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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 연구 16 군사연구 제129집 내륙으로 남하하던 연해주의병은 7월 18일 회령 남방 약 2km 지점까지 진격한 것으로 확인된다. 24) 회령까지 진출한 의병의 지휘관은 동의군 계열의 전제익․ 안중근을 비롯하여 창의군 계열의 김영선․강봉익․우덕순 등이다. 그리고 이 전 투에 참가한 의병 수는 4백 명 규모로 짐작된다. 안중근 부대를 비롯한 연해주의병은 회령군 영산(靈山)에서 일본군과 혈전을 벌였다. 7월 21일 벌어진 영산전투는 곧 안중근 부대가 수행한 마지막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참패한 연해주의병은 이후 사방으로 분산되어 일부는 연해주로 귀환하고, 나머지 일부는 함북 경성, 함남 무산 방면으로 남하를 계속하였던 것으 로 보인다. 안중근과 함께 영산전투를 치렀던 우덕순은 전투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회령 삼태골(에)서 길 안내를 하나 얻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일진회원이 었습니다. (중략) 얼마쯤 가다 보니 밀림 가운데 겨우 길이 났는데 마치 좌우로 수 목이 우거진 가운데 굴이 뚤린 셈이더군요. 그리로 들어서서 가다가 돌연 일군의 사격을 당하였습니다. 그곳에 놈들이 복병하고 있던 것이지요. 우리 의병들도 산산 히 흩어져 응전하였는데 그것이 6월 23일이었지요. 정오에 시작한 격전이 어둘 때 까지 계속하였습니다. 25) 우덕순은 영산전투 장소를 삼태골 부근으로, 그리고 전장은 수목이 우거진 밀 림지대였다고 회고하였다. 나아가 영산전투가 의병의 길안내를 맡았던 일진회원 의 유인계략에 걸려 일본군의 매복전 형태로 전개되었던 것으로 밝히고 있다. 그 리하여 정오 무렵부터 어두워질 때까지 수시간에 걸쳐 쌍방간에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황으로 보더라도 영산전투 당시의 전황은 의병측에 절대적으로 불리했음을 알 수 있다. 24) 暴徒에 關한 編冊 , 「鏡城署長發 電報」(1908.7.18);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독립운동사- 자료11 , 457쪽. 25) 「禹德淳先生 懷古談」; 윤병석 역편, 안중근전기전집 , 621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