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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 집 군사연구 제129집 15 연해주의병이 홍의동과 신아산을 비롯하여 두만강에 연한 국경지대를 장악하 면서 일본군 수비대를 연이어 격파하자, 이른바 한국주차군의 동부수비구사령관 마루이(丸井政亞) 소장은 경성(鏡城)에 있던 제49연대(12사단 소속)에 의병의 퇴 로를 차단하여 포위할 것을 긴급히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신아산이 습격을 받은 다음날인 11일 아침에는 청진수비대 병력 70명이 웅기로 급파되었고, 회령으로부 터 1개 중대를 신아산 방면으로 파견하였다. 또한 경성(鏡城)에서는 1개 중대를 회령으로 올려보내는 등의 병력 이동과 배치를 통해 관북 변경지방에 대한 초토 화작전을 시도하였다. 20) 하지만 현지로 출동한 일본군은 고건원, 홍의동을 비롯 한 경흥군과 경원군 관내의 변경지대에서 탄압작전을 수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적정은 아주 불명하다. 우리 각 토벌대는 효과를 거둘 수 없었다.” 21) 또는 “7월 15일까지 얻은 정보에 의하면 적의 행동은 퍽이나 민활하고 또 교묘해서 각 토벌 대의 군사행동은 마침내 실패로 돌아갔다.” 22)라고 하여 의병의 강력한 저항에 부 딪쳐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고 실토하고 있다. 이에 동부수비구사령관은 다시 회령에서 1개 중대를 증파하는 등 7월 15일부터 일주일 동안 부대별로 각기 일정구역을 할당하여 관북 변경지방에 대한 대탄압을 시도하였다. 당시 일본군의 이른바 작전지구의 범위는 경원에서부터 이서(以西)․ 증산(甑山)․봉산동(鳳山洞)․덕명(德明)을 거쳐 남방의 웅기(雄基)에 이르는 선 이동의 두만강 하안(河岸)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동원된 일본군은 제6중대, 제9중 대, 제10중대 및 청진에서 출동한 장교 이하 70명, 그리고 훈융(訓戎)ㆍ웅기 사이의 각 수비대 병력이었다. 이 무렵 관북 변경지대 곳곳에서는 연해주에서 출동한 의병 과 이를 탄압하던 일본군간에 거의 전면전과 다름없는 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23) 이처럼 집중적인 탄압이 가해지는 상황에서 연해주의병은 ‘13일 동안 30여 차나 교전’을 벌여야 했을 만큼 곳곳에서 혈투를 벌이면서 관북 내륙지방으로 깊숙이 남하하였다. 함경북도의 경성의병, 혹은 함경남도 일대에서 항일전을 수행하던 홍범도의 산포수의병과 연합전선을 구축하기 위해서였다. 20)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편, 한말의병자료 Ⅴ, 「參1發 303호」(1908.7.11), 91쪽. 21)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편, 한말의병자료 Ⅴ, 「參1發 호외」(1908.7.17), 98쪽. 22)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1, 1971, 669쪽. 23)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편, 한말의병자료 Ⅴ, 「參1發 호외」(1908.7.17), 98쪽. 여기에는 관북 변경지대의 전투상황이 비교적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