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page

안중근의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 연구 14 군사연구 제129집 으로 급거 출동한 것으로 보아 이 사실을 알 수 있다. 15) 고읍동을 경유한 부대는 두만강을 따라 북상을 계속한 끝에 9일에는 경흥읍 아래 신아산(新阿山)까지 진출한 뒤 10일 새벽에 그곳 헌병분견대를 습격하였다. 이때 엄인섭 부대는 경흥의 두만강 상류를 도강한 뒤 홍의동에서 북상한 안중근 부대와 합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기습을 당한 일본군은 일부 경흥 방면으로 도 주하였으며, 하사 이하 5명은 행방불명 되고 1명이 전사하는 등 참패하였다. 16) 홍의동전투 후 두만강을 따라 일시 북상한 뒤 엄인섭 부대와 합류하여 신아산 승첩을 이룩한 것은 안중근 부대였다. 이때 행방불명으로 보고된 일본군들은 의병 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안중근에 의해 인도적 차원에서 석방되었다. “10일 오전 4시 신아산 수비대는 약 2백 명의 적에게 격퇴당하였다. 1명이 전사하고 3명은 경흥수 비대로 돌아왔다. 나머지는 행방불명되었다.” 17)라는 전황보고 중 경흥수비대로 생 환했다는 3명이 곧 안중근이 석방한 일본군 포로들이었다고 인정된다. 이때 안중근 은 만국공법에 의거하여 인류 정의와 도덕적 견지에서 동료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일본군 포로들을 석방하였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불만을 품은 의병들이 대오에서 다수 이탈하게 되었고, 특히 엄인섭 부대는 연해주로 귀환하고 말았다. 18) 이처럼 안중근이 수행한 홍의동전투와 신아산전투는 연해주의병이 국내진공작 전을 전개하면서 항일전을 수행한 가운데 거둔 대표적 승첩에 해당된다. 이 두 전투는 연해주의병이 국내로 진공해온 초기, 곧 의병의 전투력이 비교적 강력하고 사기가 고조되어 있던 시기에 거둔 승첩으로 일본군에 대한 선제공격이 주효했던 것으로 보인다. 19) 15) 暴徒에 關한 編冊 , 「慶興分署長發 電報」(1908.7.9)․「鏡城署長發 電報」(1908.7.10); 국사 편찬위원회 편, 한국독립운동사-자료11 , 450~451쪽. 16) 暴徒에 關한 編冊 , 「號外」(1908.7.14);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독립운동사-자료11 , 456쪽. 17)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말의병자료 Ⅴ, 「參1發 303호」(1908.7.11), 91쪽. 18) 「安應七歷史」; 윤병석 역편, 안중근전기전집 , 162~163쪽. 엄인섭은 김기룡과 함께 안중근이 연해주에서 의형제를 맺었을 만큼 지근(至近)의 동지 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국치 후 일제의 밀정으로 변신하여 독립운동 관련 고급정 보를 수시로 일제에게 제공하는 반민족 행위를 서슴치 않았다. 1911년 단재 신채호가 발 간하던 한글신문 대양보(大洋報) 의 활자를 절취하여 이를 폐간케 하고, 1920년 북간도 용정(龍井)에서 조선은행권 15만원을 탈취하여 무기구입을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던 최봉설․임국정․윤준희 등을 밀고하였다. 19) 박민영, 대한제국기 의병연구 , 322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