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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 집 군사연구 제129집 119 독립군의 전투상황과 관련한 연구로는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의 실질적 전과(戰果)에 대해 보다 분명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였 다. 8) 이 연구에서는 독립신문 1920년 12월 15일자의 기사에 따르면 봉오동전투 에서는 일본군 전사 157명과 중상 200여명, 경상 100여명의 큰 피해를 입은 것으 로 되어 있으나 이 숫자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였다. 또한 임시정부의 자체조사인 조선민족운동연감 에는 일본군 전사자가 120명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고, 민족운 동가이며 역사가인 김정규의 일기에는 100여명의 일본군이 죽고 부상자가 심히 많았다는 기록이 보인다고 하였다. 뿐만아니라 중국측의 문헌에는 6월 7일 새벽 한 차례의 전투에서 일본군 49명이 죽었는데 이중 장교가 3명 포함되어 있었다 는 기록도 있다고 하였다. 필자는 청산리전투에 대해서도 한국측의 기록은 ‘대승(대첩)’을 강조하고 있는 것에 비해 일본측에서는 피해를 의도적으로 축소하고 있는 경향이 있다고 보았다. 즉, 국내의 경우 청산리전투에 참여했던 당사자들의 기록을 수용하여 약 3,300명 의 일본군이 살상된 것으로 주장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다분히 과장된 전과인 것으로 파악된다고 보았다. 한편 일본 측의 내부보고서에서는 가장 치열한 전투 였던 1920년 10월 22일의 어랑촌전투에서 조차 일본군의 피해가 고작 보병 전사 1명, 부상 4명, 기병 전사 2명, 부상 7명으로 축소되어 나타나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필자는 여러 가지 자료를 종합해 보면 청산리대첩에서 독립군은 약 400~500명의 일본군을 섬멸했을 것으로 보이며, 일종의 ‘신화’로 자리 잡고 있는 청산리전투의 실상을 이제는 냉정한 이성과 학문적 입장에서 이해하고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간도참변에 대해서는 1920년 10월부터 1921년 초까지 일제가 간도에서 자행한 만행에 대해 학계의 철저한 진상규명이 필요하며, 이를 통해 일 본의 사과와 배상을 받아 내야한다고 하였다. 필자의 주장은 대체로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 및 뒤이어 전개된 간도참변에 대해 보다 적극적이고 객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9)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과 관련해서는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의 보도 8) 장세윤, 앞의 책, 42~25쪽, 155~156쪽. 연구경향과 관련한 선행연구에 대한 검토는 주로 이 논문의 내용을 참조하였다. 9) 채영국, 「중국동북지역 속의 한국근현대사를 자신감 있게 파헤친 역작」, 한국근현대사연구 제38집 한국근현대사학회, 20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