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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 하얼빈의거와 순국 100주년의 성찰 104 군사연구 제129집 셋째, 안 의사의 하얼빈의거를 종래와 같이 의열투쟁의 대표적 사례로만 강조 되느냐, 아니면 일제와 혈투한 독립전쟁의 일환으로도 중요한 위상을 겸한 사실 로 확인시킬 과제에 대한 심층연구의 추진이다. 안 의사는 《동양평화론》에서 하얼빈의거를 ‘동양평화의전(東洋平和義戰)’이라 하였고, 가혹한 심문과 극형에 몰아넣으려는 위장된 공판에서도 한결같이 ‘나는 한국의 의군 참모중장으로 독립 전쟁(獨立戰爭)을 하는 중이고 그 일환으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포살하였 다. 따라서 나는 형사범이 아니고 전쟁포로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60) 환언하면 조국독립전쟁에 참여하여 혈전을 벌린 것이다. 적어도 안 의사는 1907년 8월 망명후로부터 1909년 10월 하얼빈의거 때까지 연해주를 근거지로 하여 의병항전을 위하여 동의회(同義會)에 참여 혈전하였다. 더 나아가 각자 자기 몸을 바쳐 조국의 독립을 회복할 수 있는 강력한 일심단체 (一心團體)인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를 조직 운영하면서 독립전쟁을 솔선 추진 한 의병의 주장이었다. 게다가 하얼빈의거 때도 편의복(便衣服)을 입었을 뿐이지 국내 육진(六鎭) 진공작전시 동료인 우덕순을 비롯하여 조도선 유동하 등과 긴밀 한 합동유격작전을 통하여 한국침략의 수괴이며 동양평화의 공적(公敵)인 이토 히로부미를 포살응징하였다. 그러므로 안 의사는 나라를 빼앗은 침략의 괴수이며 평화의 공적인 이등을 포 살한 ‘의사’ 혹은 ‘의협(義俠)’이라고 해도 당연하지만 그 보다도 나라를 도로 찾 으려는 한국의군의 ‘의병장’ 또는 한국독립군의 ‘주장(主將)’ 또는 ‘사령관(司令官)’ 혹은 ‘장군(將軍)’이라 함도 무리없는 가명(嘉名)인 것이다. 또한 안 의사는 앞에 서 언급한 바와 같이 ‘나는 정정당당한 진(陣)을 펴고 이토(伊藤)의 한국 점령군 에게 대항하기를 3년, 각처에서 의군(義軍)을 일으키어 고전분투 간신히 하얼빈에 서 제승(制勝)하여 이토를 죽인 나는 독립군(獨立軍)의 주장(主將)이다’ 라고도 주장하였다. 따라서 안 의사는 한국독립운동사상 의열투쟁과 독립전쟁을 겸행한 ‘순국선열’로 칭예되어야 마땅하다. 연구의 심화가 절실한 과제이다. 한편 안 의사의 하얼빈 의열투쟁은 그 전후 있었던 이준(李儁)의 헤그순국과 장인환(張仁煥)․전명운(田明雲)의 샌프란시스코 의거 및 이재명(李在明)의 이완 용(李完用) 자상(刺傷)의거 그리고 강우규(姜宇奎)의 남대문 의거까지 밀접히 연 관된 정황이 관계자료에서 적지 않게 발견된다. 특히 안 의사는 이들 관계인과 60) 앞의《대한국인 안중근, 사진과 유묵》, 110~112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