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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 하얼빈의거와 순국 100주년의 성찰 102 군사연구 제129집 《동양평화론》은 이와 같은 여순 군항을 동양평화의 근거지로 삼는 내용도 포 함되었겠지만 그보다 안 의사의 한국의 독립회복과 당시 제국주의 국제관계에서 동양평화를 이룩할 탁월한 정치사상과 구체적 정략이 담겨져 있다. 한국은 안 의사가 1910년 3월 26일 일제의 사형집행으로 순국한 후 이토 히로 부미가 주도하던 식민지화정책이 가츠라 타로(桂太郞) 야마가다 아리토모(山縣有 朋) 데라우치 마스다께(寺內正毅) 등 군벌인물에 답습되어 대한제국은 명망하고 일제의 조선총독부가 설치되어 가혹한 무단정치가 시행되었다. 미중유의 민속수 난시대가 본격화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일제의 남북만주와 중국으로 향하던 대 륙침략정책도 그대로 강행되어 안 의사의 예언대로 동양 전체가 ‘까맣게 타 죽는 참상(黑死慘狀)’인 풍운의 전란이 연속되어 갔다. 58) 일제의 남만주 침략과 그를 이은 1931년의 만주사변, 1937년의 중일전쟁, 1941년의 태평양전쟁으로 번져 제2차 세계대전까지 연결된 것이다. 그러나 일제는 1945년 8월 미ㆍ중ㆍ러ㆍ영을 주축으로 하는 연합군에 패전하여 동양의 전화는 멈췄다. 국내외에서 일제와 혈투하던 우리 민족은 그런 속에서 해방을 맞이하고 광복된 새 나라를 세우게 되었다. 그러나 일제가 저질렀던 오랜 전란의 여독은 ‘황폐와 빈곤’ 속에 이념 대립을 동반한 남북분단과 그를 이은 6․25전란 등의 또 다른 시련으로 이어갔다. 하지만 이와 같은 배경하에서도 ‘대한민국’은 그동안 산업화 와 민주화를 추진하여 오늘의 세계적 위상을 차지하였다. 이 속에는 살신순국한 안 의사의 하얼빈의거와 동양평화를 자임한 안 의사의 정신과 유덕이 깊숙이 스며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안 의사가 확신한《동양평화 론》은 햇빛을 본 것인가. 패전 후 평화헌법을 전제로 재기한 일본은 지난날을 대 오각성하여 ‘안중근의 날’을 찾고 있는 것인가. 그동안 정부와 사회 각계에서 안 의사의 현양사업이 적지 않게 추진되어 민족정 신과 자주적 국민의식 고조에 이바지하였다. 또한 학계에서도 안 의사의 구국적 행 적과 동양평화사상, 그리고 하얼빈의거 관련 자료의 수집정리와 여러 관련과제 연 구에 적지 않은 성과도 축적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격동과 시련의 한국근현대 사에서 안 의사의 올바른 위상과 허얼빈의거의 역사적 의의를 정립함에는 아직도 미진하고 소략한 사항이 여러 모로 발현되고 있다. 더욱이 일본이 아직도 내세우는 근대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의 위상과 대비하면 적지 않은 과제가 부상하고 있다. 58) 앞의《東洋平和論》〈序〉; 앞의《안중근전기전집》, 186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