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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 역 사 및 역 사 일 반 군사연구 제128집 53 를 충실이 이행하는 괴뢰정부를 세웠다. 그러나 영국의 이 지역 지배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아프가니스탄 주민들이 대대적인 항전을 개시하고, 이를 견디지 못한 영국이 결국 철수했기 때문이다. 영국군의 퇴로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700명의 영국군과 3,800명의 인도인 용병들의 생명이 눈 쌓인 산악지대에서 사라져 갔다. 눈 쌓인 고산지대를 90마일이나 행군한다는 것은 영국군에게는 죽음의 행진이었다. 그리 고 아미르 도스트 무함마드는 아프가니스탄 최고 통치자의 권좌에 복귀했으며 1863년에는 아미르 도스트 무함마드의 아들이 권자를 이어 받았다. 그는 러시아 와 외교관계를 맺었다. 영국은 아프가니스탄이 러시아와 외교관계를 맺게 된 것 을 못마땅해 했다. 그래서 영국은 인도의 지원을 받아 1878년 다시 한 번 카불을 침공했다. 그리고 영국군의 주둔을 인정하는 조약에 강제 서명토록 했다. 무력에 못이겨 외교문서에 굴욕적인 서명을 해야 했던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은 다시 한 번 항전에 나섰다. 그들은 그들 방식의 독특한 항전을 통해 영국군과 그들을 돕 는 인도군들에게 적지 않은 타격을 입었다. 물론 아프가니스탄 저항군의 손실도 적지 않았다. 그리 길지 않은 항전기간 동안 무려 6만 명의 아프간 전사들이 사망했다. 이들 을 이끌던 지도자들은 이슬람 성직자들이었는데, 그들은 그들의 항전을 영국의 ‘이교도’를 상대로 한 ‘지하드’로 규정했다. 그들은 가지즈라고 불리는 암살단을 조직하고 암살 대상자들의 명단을 작성하여 상대방의 중요 인물들에 대한 암살을 감행했다. 영국은 아프간인들의 강력한 저항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아프간을 그들 손으로 장기간 직접 통치하는 것은 힘들다고 판단하고 1880년 아미르 도스트 무함마드의 손자를 왕위에 앉히고 병력을 철수시켰다. 그 결과 아프가니스탄 영토의 일부가 인도에 할양되었으며 1893년 아브도르 라 흐만(Abdurrahman) 칸 때 인도와의 국경선이 확정되고 1901년에는 연금을 받기 로 하고 외교권을 인도에 일임하게 되었다. 1905년 하비브알라(Habibullah)가 이 조약을 비준함으로써 아프가니스탄은 영국의 보호국이 되었다. 또한 1907년에는 러시아도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영국의 우위를 인정하였다. 하비브알라는 내정면에서 하비비아 학교의 기초를 다지고 페르시아어 주간신문 을 발행하여 민족적 자각의 향상을 촉진함과 동시에 대외적으로는 제1차 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