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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 사 사 / 기 타 군사연구 제128집 271 혼란스러웠던 당시 조선후기의 상황에서 군사사상을 정립하길 원하고, 군의 개혁 을 통해서 국가를 지켜야 하는 군의 고유 역할을 다하게 하고자 했던 다산의 국 가와 군에 대한 열정과 신념 그리고 가치관은 지금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적 으로 연구되고, 새겨져야 할 숭고한 부분인 것이다. 이러한 다산의 군사사상을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방법 이 있겠으나, 본 연구에서는 다산의 주요 국방관련 저서인「아방비어고」와「민 보의」를 통해 그의 군사사상을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독자 성’과 ‘현실성’ 측면에서 제시해 보고자 한다. 3. 다산의 군사사상 이해 가. 조선후기 국방 현실과 다산의 개혁 의지 조선후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2백년 이상 평화의 시기를 유지하면서 자연스럽게 국방에 대한 관심이 희미해지고 군사제도나 국방체제도 허술해졌다. 중앙군은 단순히 수도 서울의 방위만을 담당하고, 지방군은 편성이나 훈련이 제 대로 이루어지지 못했으며, 군사동원체제도 문제점을 드러내어 황구첨정 10) , 백골 징포 11) 등의 현상이 만연되어 있었다. 조선후기의 국방상황을 객관적으로 묘사해줄 수 있는 부류 중 하나가 당시 외 국의 선교사들일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프랑스 신부가 저술한「조선교회사」 라는 책에 기술된 당시 조선군에 관련된 내용을 발췌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의 군대는 명부상으로는 120만 명 이상이지만, 이 장부는 전혀 신용할 수 없다. 대개의 경우 거짓으로 이름만 채워져 있다. 죽은 사람들의 이름이 실려 있 고 기록되어야 할 사람들은 하급관리에게 뇌물을 주고 병역의무를 면한다. 그나 마 조선의 군대다운 군대는 서울의 4대 군영에 주거하고 있는 1만여 명 뿐이다. 이들은 약간의 군사훈련을 받고 있었다. 또한 조선에는 문무를 겸하는 관리가 매 우 많은데, 이는 2세기 이상이나 조선이 지녀온 평화로서 설명된다. 군대는 불필 요한 것이 되었으므로 그 편성에 관한 것은 대개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10) 황구첨정 : 조선후기 군정(軍政) 운영에서 나타나던 폐단의 하나로 황구라는 말은 어린아 이라는 뜻이며, 어린아이를 군적(軍籍)에 올려 군포를 내게 했던 것. 11) 백골징포 : 면작농가(棉作農家)에게 면포를 징수하는 과정에서 생긴 용어로 가족수의 많 고 적음에 따라 면포를 거두었기 때문에 죽은 사람에 대해서도 호포 및 신포가 부과되는 사례가 확산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