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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약용 군사사상의 현대적 의미 270 군사연구 제128집 신헌(1811∼1884) * 조선후기 내우외환 시기에 무관으로 중책을 맡음.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다산의 군사사상을 실천성이 결여된 이상주의적 인 내용이라고 치부하는 것은 결과에만 치우친 매우 섣부른 판단이라 하겠다. 나. 신헌의 「민보집설」로 연계성 다산의「민보론」이 실제 제도적으로 시행되었던 시기는 놀랍게도 수십 년이 지난 후였다. 다산의「민보론」을 제도화했던 인물은 신헌인데, 신헌은 1811년 대 대로 무과급제자를 배출한 무반가문에서 태어나 17세에 국왕친위대인 별군직에 천거를 시작으로 18세에 무과에 급제하고, 이후 헌종 의 총애를 받으며 39세에 금위영 대장 이후 좌포도 대장, 통제사, 형조판서, 총융사, 훈련대장, 어영대장 을 지낸 인물이었다. 1862년 신헌은 이양선 출몰 등 으로 위협이 되었던 서양 세력에 대한 대응책으로 두 번의 상소를 올려 민보 설치를 건의했고, 1866년 프랑스 함대가 양화진에 나타나는 것을 계기로 「논 병사조」를 올려 서양의 무력에 대처하기 위해서 민 보 방위를 시행할 것을 건의한다. 또한 1867년 좌참 찬의 직책에 있던 신헌은 「진군무소」를 올려 민보 방위를 다시 주장했는데 여기에는 서양에 군사력에 대한 치밀한 방어를 위한 민보 방위론을 구체적으로 주장했다. 이러한 신헌의 건의는 국왕의 허락을 받게 되고 전면적이고 획일적으로 시행되지는 않았지만 지방이 자율적으로 시행하게 하였다. 신헌은 민보의 시행을 위해 민보에 관련된 보제나 보약에 관한 내용을 책으로 엮어 지방에 보내 백성들에게 따르도록 하기 위해 「민보집설」을 저술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다산 의「민보의」를 많이 참조하였다. 즉, 다산의「민보의」는 수십 년 후에 적용이 될 정도로 미래지향적이고 개혁적인 내용이었으며, 다산의 군사사상이 당대에 실 천되지 못했다는 단편적인 이유로 현실성이 결여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해 라는 것을 입증해 주는 것이다. 이처럼 다산의 군사사상이 실천성을 결여하였으며, 낡고 진부하다는 생각은 그 안에서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지 못하는 우리의 생각이 낡은 것이며 가치를 발견 하지 못하는 우리의 안목이 진부한 것이라 생각하며, 지금보다도 더욱 급변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