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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 사 사 / 기 타 군사연구 제128집 267 정약용(1762∼1836) * 조선후기 실학의 거두. 정18년 간 유배생활 동안 5백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2. 왜 정약용인가? 그렇다면 ‘왜 많은 군사사상가 중에서 정약용인가?’라는 생각을 해 볼 수 있다. 물론 우리가 알고 있는 정도전, 이순신, 양성지, 유성룡 등 다른 인물들을 생각하 지 않을 수 없다. 당연히 앞서 열거한 위인들의 군사사상도 충분히 연구할 가치 가 있으며, 실제 여러 학자들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연구를 해왔다. 그러나 다산 정약용은 해박한 지식과 실천적 철학을 바탕으로 군사분야에 대한 분명한 주장과 저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좌 천되어 귀양지에 있었으며, 그가 주장한 군사제도나 전략이 당대에 시행되지 못했다는 이유로 군사사상 측면에서는 그리 주목받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 러나 다산은 분명히 합리성와 논리성을 바탕으로 급변하고 혼란스러웠던 당시 조선후기의 상황에 적 합한 형태로 군의 개혁을 이루어서, 국가를 지켜야 하는 군의 고유 역할을 다하게 하고자 했었음으로 연구해야 할 가치가 있는 위인이라는 면에서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산 정약용에 대해 무어라 규정을 내리는 일은 참으로 난감하다. 그는 경전의 미묘한 뜻을 낱낱이 파헤친 걸출한 경학자(經學者)였으며, 복잡한 예론 (禮論)을 촌촌이 분석해낸 꼼꼼한 예학자(禮學者)였다. 목민관의 행동지침을 정리 해낸 탁월한 행정가요, 아동교육에 큰 관심을 가져 실천적 대안을 제시한 교육학 자며, 지나간 역사를 손금 보듯 꿰고 있던 해박한 사학자였다. 그래서 나는 그야 말로 현대가 요구하는 통합적 인문학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어느새 화성 축성을 설계하고 기중기와 배다리와 유형거를 제작해낸 토목공학자요 기계공학자 였으며, 「아방강역고」와 「대동수경」을 펴낸 지리학자였고, 한편 「마과회통」과 「촌병혹치」등의 의서를 펴낸 의학자였다. 그래서 과학자인가 싶어 보면, 또다시 그는 형법의 체계와 법률 적용을 검토한 법학자로 돌아왔고, 어느새 속담과 방언을 정리한 국어학자가 되어 있었다. 백성의 아픔을 함께 아파한 시인이자 날카롭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