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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 사 사 / 기 타 군사연구 제128집 257 2. 병자호란 격전지 67)와 경기도 관방 1636년(인조 14년) 12월 청 태종은 130,000명으로 조선을 침공하였다. 청의 공 격계획은 향도(嚮導)를 앞세우고 선봉부대는 한성으로 直衝하여 한성과 강화도의 통로(양화진)를 차단하고, 좌익군은 선봉부대의 뒤를 따라 조선 국왕의 퇴로를 차 단하며, 본군은 서로 요해지 공략(의주․안주․평양․황주), 중요지역 병력 잔류, 치중 임무를 부여하였고, 우익군은 동로 요해지 공략(창성-영변-안주) 이후 강화 도로 진출하는 것이었다. 조선의 방어계획은 각기 지정된 산성에 입거하여 최대 한 청군의 남하를 저지하여 수도권 방어 시간을 획득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의주 의 백마산성, 용천의 용골산성, 선천․곽산․정주의 능한산성, 영변의 철옹산성, 평양의 자모산성, 황주의 정방산성, 평산의 장수산성 등의 산성을 거점으로 하여 방비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청군의 신속한 남진과 강화도-한성 간의 통로 봉쇄는 조선의 수도권 방어에 결정적 타격을 가하게 되었으며, 함경도, 평안도,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 경기․황해도 근왕병들은 남한산성으로 접근하는 통로를 청군이 차단함에 따라 남한산성에 고립된 인조는 청조에 굴복하게 되었다. 인조 시대 산성 중심 전투수행 배경은 “병력이 많을 경우에는 되도록 평지에서 싸우고, 병력이 적을 경우에는 되도록 험한 지형에서 싸우라.” 68)는 병법의 내용과 청의 기병이 산성 공격과 수전에 약함에 비롯된 판단으로 유추된다. 전술적 측면 에서는 평지보다 산성에서 청의 기병을 대적함이 승리를 보장할 수 있다. 69) 하지 만 전략적 측면에서 소극적인 거점중심의 산성 방어체계는 단지 적의 후방을 차 단, 교란하는 역할로 한정될 수밖에 없다.『병학지남』에서는 적과 대치하는 곳은 곧 머리가 되어 正兵이 되고, 좌우에 해당하는 곳은 날개가 되어 奇兵이 되며, 뒤 에 해당하는 곳은 꼬리가 되어 策應兵이 된다고 보았다. 70) 하지만 적과 직접 대 치하여 적의 예봉을 막아주는 머리인 정병이 없이 좌우에 해당하는 산성 병력과 꼬리에 해당하는 근왕병의 병력만 있었기에 청의 공격에 대전할 수 없었던 것이 다. 산성 외의 주요 요해지를 방비하지 않음이 패배의 원인이 되었다. 단적인 예 67) 상게서, pp.133∼240. 68)『병학지남연의(Ⅱ)』p.175. 69) 평안도 근왕병인 홍명구는 탑동에서 평지에 진을 폈으나 청의 포위망 형성과 화공에 의한 목책 제거로 패배하였지만, 백동 고지의 유림군은 험준한 지세에 의지하여 청군의 4차례 공격을 물리칠 수 있었다.『병자호란사』, 전게서, pp.197∼201. 70)『병학지남연의(Ⅱ)』p.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