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page

. 군 사 사 / 기 타 군사연구 제128집 255 세력 65)을 제압하기 위하여 기병 6,000기로 구성된 6개 군으로 침공하였다. 이를 위해 압록강에서는 창성과 의주를 동시 공략하여 다른 요해지와의 연락을 차단하 고, 조선으로 하여금 서로(의주-선천-곽산-안주)와 동로(창성-구성-안주)를 동시 배비하게 함에 따라 구성에 있던 평안병사 남이홍은 의주, 창성 어느 곳에도 병 력을 증원할 수 없었다. 압록강의 주요 요해지인 의주, 창성 함락 이후에는 2개 군으로 하여금 모문룡 군을 소탕토록 하고 4개 군으로 하여금 용천(압록강 입구), 선천․곽산․정주(서로 요해지) 공략 이후 안주를 점령토록 하였다. 조선군은 선 천․곽산․정주의 병력을 곽산 능한산성에 집결하여 청의 진출을 저지하여 청천 강 요해지인 안주 방비 시간을 벌었다. 하지만 청천강 남안의 가장 주요한 군사 적 거점인 안주성 전투에서 청군의 포위공격에 평양성 감사 윤훤은 8,000명에 달 하는 병력이 있었지만 구원하지 않아 안주성이 함락됨에 따라 평양성 민심이 동 요되어 군민이 도주하여 평양성을 포기하게 되었다. 이어서 황해병사도 황주를 포기하고 봉산으로 후퇴함에 따라 순차적으로 방어선이 무너지게 되었다. 창성과 의주는 임진왜란을 통해 연변방어체계의 한계로 정보획득, 적 진출 지 연, 청천강 중심의 방어 준비를 이루기 위한 목적으로 진행되었다. 따라서 정묘호 란 초기 창성과 의주는 청군에 의하여 함락되었지만, 안주-평양-황주-평산-도성 (남한산성, 강화도)에 따른 축차적인 방어선 구축과 전쟁지도부 방비 시간을 확보 할 수 있었다. 특히 압록강을 도하한 청군이 곽산의 능한산성을 공격함에 따라 광해군이 계획하였던 것처럼 곽산의 능한산성에서 의지하여 안주성를 방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안주성 전투에서는 광해군이 추구하였던 것처럼 평양을 중심으로 안주성을 응원하는 종심적 기동방어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방어선에 의한 단계적 방비는 병력의 축차 투입에 의한 병력 소진이 발생하고, 방자의 심 리적 위축감으로 패하게 됨을 보여준다. 만약 안주성 혹은 평양성으로 출정하여 정예 병력과 응원군으로 청천강 및 대동강에서 결정적 전투를 수행하였더라면 그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65) 모문룡 세력은 청의 입장에서 내부교란과 반란유도로 요서진출의 장애물이었고, 명의 입 장에서는 청의 견제역할을 하였으며, 또한 전략적 거점인 가도의 해상권을 확보하여 위 협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