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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세기 초 평안도 및 경기도 관방의 특징 254 군사연구 제128집 중앙군의 정치화에 따른 수도권 중심의 방어는 안으로부터 왕위 찬탈자에 의해 무너지게 되었다. 따라서 적정 수준의 전투력을 서울에 두어 왕권을 보호하되, 필 요시 전쟁지도부 방호 계획과 그에 따른 응원 계획 수립에 역점을 두어야 함을 알 수 있다. Ⅳ. 호란에 나타난 관방의 특징 광해군 시대 관방이 청천강을 1차 방어선이면서도 핵심 방어선으로 선정하고 이를 평안도 내에서 서로 응원하는 태세로 적의 진출을 지연시키고 동시에 수도 권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광해군 시대 수도 관방의 한계점인 방어영의 독자적인 지휘권에 따른 반란을 우려한 인조는 총융청으로 하여금 지휘권을 일원화시켜 수 원, 장단, 양주, 광주, 남양을 통제한다. 62) 하지만 1624년 1월에는 이괄의 난이 발 생하여, 인조는 공주까지 피난가게 되었다. 이괄의 난 이후 개성에 어영청을 설치 하고 이서와 이귀가 주장한 수도 방위 강화 목적의 강화도와 남한산성 수축되어 수도중심 관방이 더욱 집중된다. 정묘호란 시기 청은 조선의 핵심 방어선인 안주 를 1차 목표로 침공이 이루어졌는데, 이는 평안도 주 요해지가 서로 응원하는 태 세를 잃었기 때문이었다. 정묘호란에 의한 패배 이후 인조 정권은 주요 산성 거 점 위주 방어로 청의 기병을 차단 및 교란한 상태에서 수도를 중심으로 방비하고 자 하였으나, 전쟁지도부가 고립됨에 따라 각 도에서 출발한 응원부대와 합류하 지 못해 결국 패하고 말았다. 이는 남한산성이 응원군과의 호응이 연계되는 방어 망 구축이 제한되는 지역이라는 단점을 고려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63) 1. 정묘호란 격전지 64)와 평안도 관방 1627년(인조 5년) 1월 8일 패륵 아민을 총대장으로 편성된 청군은 조선과 모문룡 62)『만기요람』군정편3, 총융청 개영시말조. 63) 강성문, 전게서, pp.16∼8. 남한산성은 관방로에 있어서 취약점은 기각지세를 형성할 만한 성이 없다는 점에서 병자호란 패배의 원인이 있다. 강성문, 전게서, p.129. 64) 국방부전산편찬위원회, 『병자호란사』(서울 :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1986), pp.48∼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