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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세기 초 평안도 및 경기도 관방의 특징 252 군사연구 제128집 지나 올라오는 바닷길의 요충으로 52) 최우선 추진되었다. 청의 위협이 가속화되 는 후기에는 보장처인 강화도 방비, 서해안 명과의 교통로 확보, 황해도〜한강 접근로 확보를 통한 청군 공격 저지 등의 목적으로 양화도 수군 훈련이 진행 되었다. 53) 수도 외곽지역 관방은 선조 시대 류성룡이 추진한 수원과 용진의 방어영 54)을 중 심으로 이루어졌다. 선조 29년(1596)에 2개 영을 총괄하는 獨鎭의 개념인 방어영 체제로 수원과 용진 방어영이 형성되어 광해군 시대에도 지속되었다. 55) 방어영은 『병학지남』의 이층진의 정형적인 전법의 내용을 관방에 적용시킨 것으로 즉각 동원이 가능한 부대로 정예화 달성이 가능하다. 하지만 방어사의 지휘통제가 절 대적임에 따라 56) 반란에 동원될 수 있다는 단점을 지닌다. 후기 청의 위협 심화 와 평안도 관방의 미약은 수원, 파주, 장단, 이천의 4개 방어영 창설로 이어졌 다. 57) 특히 장단과 파주는 임진강을 도하하는 임진진 요해지로 삼국시대 전쟁으 로부터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 주요 전략적 요충지였다. 58) 하지만 방어영의 확장 52) 강화도는 개항기(18세기말〜19세기)에는 한강 관문의 방비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강화 해 협 중심의 해방론을 추구하기도 하였다. 강성문, 상게서, pp.24∼6. 손돌목은 강화군 덕진 진과 김포군 안행리 사이 해협으로 손돌목의 돌출부에 암초가 있는데, 수심 5미터의 조 류가 소용돌이치며 많은 배들이 여기에서 난파당하였다.『택리지』팔도총론-경기도 -p.126. 53)『광해군일기』권166, 광해군 13년 6월 8일; 권166, 광해군 13년 6월 23일, 27일 ; 권144, 광해군 11년 9월 10일 ; 권144, 광해군 11년 9월 13일. 54) 조선전기 방어사가 비상체제에 파견된 무장인 반면, 후기는 주요 관방 및 요해처에 설치 되었으며 방어영에 대한 위치는 선험적인 연구는 차문섭, “조선후기 병마방어영 설치고,” 『조선시대 군사관계연구』, 전게서, 참조. 55)『군문등록』병신년 7월 20일조, 병신년 12월 4일조, 병신년 10월 24일조, 병신년 12월 5 일조, 병신년 12월 18일조. 등의 기사를 통해 경기도 수원과 죽산을 합쳐 수원 독성에 우 방어영을, 파사와 용진을 합쳐 용진에 좌방어영을 설치함을 알 수 있다. 차문섭도 영장을 요해지 방어의 독진의 체제로 보았으며, 선조 34년에 수원 방어영을, 광해군 10년 이전에 파주방어영이 설치됨을 보여 용진 방어영에 대한 논의는 제외되었다. 56) 방어영은 군사권과 행정권을 다 같이 구사하며, 영장은 군사조련, 지휘권 등 군사권을 구 사하지만 행정권은 각 수령들에게 있다. 차문섭, 전게서, p.264. 57) 좌방어영은 파주, 우방어영은 수원(독성)을 설치하고 추가적으로 장단과 이천에 방어영을 설치하였다. 『광해군일기』권129, 광해군 10년 6월 22일; 권157, 광해군 12년 10월 17일. 차문섭은 파주에서 장단으로 방어영이 이설되었다고 보고 있으나 이설보다는 증설로 보 인다. 58) 임진강 유역의 군사적 가치에 대해서는 정재열, “4∼7세기 삼국의 군사전략 연구-임진강 유역 성곽과 전쟁사를 중심으로,”(석사학위논문, 국방대학교, 2007), pp.15∼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