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page

. 17세기 초 평안도 및 경기도 관방의 특징 246 군사연구 제128집 Ⅲ. 광해군 시대 관방 광해군 시대(1608〜1623)는 임진왜란(1592)과 호란(1627, 1636)사이라는 특수성 과 함께, 조선전기에서 후기로 이어지는 과도기적 성격을 지닌다. 전통사회에서 군은 그 쓰임새에 따라 크게 ‘외적의 방어’와 ‘대궐의 호위’로 구분할 수 있는데, 외적의 방어는 중앙군의 몫이었다면 대궐의 호위는 지방군의 몫이었다. 21) 광해군 시대는 지방군과 중앙군 모두 혼란의 시기였다. 조선전기 오위진관제도에서 류성 룡이 주장한 중앙군의 훈련도감군과 지방군의 속오군이 정착되는 과정이었다. 지 방군에 있어서는 척계광의 『기효신서』도입으로 土兵 22)과 토관의 방비체계에서 지방행정기구인 수령과 영장 23)에 의한 속오군(束伍軍)과 아병(牙兵) 24) 중심으로 변화되어가고 있었다. 중앙군은 훈련도감과 4개 방어영 체제가 인조시대 5군영 창설로 이어졌다. 이런 제도의 변화 과정속에서 관방도 적의 위협과 국내 환경에 따라 그 중점이 변화되어 왔다. 25) 광해군 시기는 국내외 정세를 바탕으로 광해군 집권 이후 대북 세력이 정국을 주도하게 되는 계축옥사까지를 전기(1608〜1613), 계축옥사 이후 사르흐 전까지를 중기(1613〜1618), 사르흐 패전 이후 인조반정까지를 후기(1619 〜1623)로 볼 수 있다. 전기에는 임진왜란 이후 군사력 건설을 위한 요해지 중심 의 관방론, 중기에는 청의 위협 확대에 따른 대청 방어를 위한 고개와 강중심의 관방론, 후기에는 패권국과 위협국에 대한 기민한 외교책과 함께 수도중심 관방 이 진행되었다. 따라서 위협의 변화에 따라 큰 맥락으로 살펴본다면 사르흐전 이 전에는 국경방어의 한계를 인식하고 방어종심을 유지하기 위한 강 중심의 단계별 21) 김우철, “임진왜란과 조선후기 지방군제의 재편,” 전쟁기념관, 『우리나라의 대외항쟁과 호국정신』p.51. 22) 토병은 국경지역 鎭과 保에 60〜100명이 상주하여 농사를 지으며 여진족 침입에 대비하 는 전통 있는 정예병으로 국경방어의 주 병력 이었다. 이장희, “조선전기 변계수어와 토 병,” 『군사』2(1981), pp.138∼145. 23) 영장(營將)은 속오군의 최상부 단위인 營의 책임자로, 操鍊과 지휘를 총괄하는 지휘관이 다. 속오군의 편제는 營(영)-사(司)-초(哨)-기(旗)-대(隊)인데, 영의 지휘관이 영장이다. 24) 속오군은 編伍軍, 三手軍, 哨軍 등으로 불리며 조선후기 지방군의 중추 군대이다. ‘속오’ 는 군대의 편제를 의미하는 것으로 척계광의 분군법을 바탕을 두고 있는 것으로, 임진왜 란 과저에서 모습을 갖추어 이후 두차례의 호란을 거쳐 지방군으로 정착되어 나갔다. 牙 兵이란 본진에서 대장을 수행하는 병사를 의미한다. 25) 장성진, “광해군 시대 국방정책 연구”, (석사학위논문, 국방대학교,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