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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 사 사 / 기 타 군사연구 제128집 197 화가 동시에 달성되리라 낙관적으로 전망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제는 백색인종의 침략을 함께 방어해야 할 입장에서 오히려 한국과 청국을 침략․지배하는 등 동 양평화에 대한 신의를 저버렸다. 광무황제 강제퇴위나 군대해산․정미7조약 체결 등을 목도하면서 일본에 대한 강한 배신감과 아울러 반일적인 활동을 전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43) 동양평화론 서론은 안중근의 사상적 기반과 내면성은 물론 자주독립을 향한 구국의지와 열정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재판장에게 “나는 옥중에서 동양정책(동 양평화론-필자주)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 44)면서 탈고할 수 있도록 사형 집행 을 연기해 줄 것을 요청하여 허락까지 얻어낸 상태였다. 이는 삶의 경험을 통한 현실인식과 사상을 정리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다음과 같은 회고에서 절실 한 심경을 엿볼 수 있다. 전옥(典獄) 율원씨(栗原氏)의 특별 소개로 고등법원장 평석씨(平石氏)를 만나…(중 략)…사형(死刑)판결의 불복 이유를 대강 설명한 뒤에 동양대세의 관계와 평화정 략 의견을 말했더니 고등법원장이 다 듣고 난 뒤에 감개하여…(중략)…그대의 진 술하는 의견을 정부에 품달하겠다고 하였다.…(중략)…나는 만약 허가될 수 있다 면 동양평화론 1책을 저술하고 싶으니, 사형집행 날짜를 한 달 남짓 늦추어 줄 수 있겠는가 했더니, 그는…(중략)…몇 달이 걸리더라도 허가하겠으니 걱정말라 기에…(중략)…공소권 청구를 포기했다.…(중략)…고등법원장의 말이 과연 진담 이라고 하면 굳이 더 생각할 것도 없어서였다. 그래서 동양평화론을 저술하기 시 작하였다. 45) 안중근은 동양평화론 저술에 심혈을 기울였으나, 일제가 동양평화론 집필 을 끝내기도 전에 사형을 집행함으로써 완결된 저술로서 남기지 못하였다. 즉 「서언」전부와 「전감」일부만이 집필되었을 뿐이다. 이를 보완할 수 있는 부분은 1910년 2월 17일 관동도독부 고등법원장과 3시간 가량 걸친 특별면담에서 엿볼 수 있다. 통역 원목말희(園木末喜)와 서기 죽내정위(竹內靜衛)가 배석한 가운데 진행된 43) 국사편찬위원회, 「境警視의 訊問에 대한 安應七의 供述(제3회, 1909년 11월 29일」, 한국 독립운동사자료 7, 405쪽. 44) 국가보훈처 편, 「亞洲第一義俠 安重根」3, 殺人犯被告安重根聽取書 , 633쪽. 45) 조선일보 1979년 9월 21일 「속자서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