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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중근의 동양평화론과 그 의미 196 군사연구 제128집 비롯되었다. 구체적인 방안은 일본을 맹주(盟主)로 한․중․일 3국이 동심협력하 는 일본맹주론을 제시하였다. 우리 동양은 일본을 맹주로 하고 조선․청국과 정립(鼎立)하여 평화를 유지하 지 않는다면 백년의 대계를 그르칠 것을 감히 두려워한다. 이등박문의 정략은 이 에 반하여 함부로 한국을 병합하는데 급급하여 다른 상황을 고려할 틈도 없이 동 포를 살육하고 황제를 위박(威迫)하여 그 횡포가 이르지 않는 것이 없다. 그가 잡 은바 방침을 고치지 않고 이대로 추이(推移)하면 우리 동양3국은 다같이 쓰러지고 백색인종의 유린(蹂躪)에 맡기지 않으면 안된다. 러시아와 청국 양국이 일본을 향 하여 다시 싸우려고 하는 형세가 있음은 당연한 일이며, 미국 또한 일본의 발호 (跋扈)를 좋아하지 않는다. 점차 세계의 동정은 한국․청국․러시아의 약자에게 모이고 (이에 따라) 일본은 고립한 위치에 설 것은 지금부터 예상하여도 어렵지 않다. 이것을 생각하지 않고 일시 세력에 의지하여 우리 한국의 독립을 빼앗으려 는 것은 천견(淺見)으로서 지자(智者)의 치소(嗤笑)를 초래하고 말 것이다. 39) 이는 당시 박은식(朴殷植)이나 신채호(申采浩) 등과는 달리 일본에 대한 인식이 매우 호의적임을 의미한다. 40) 적어도 러일전쟁 이전까지 그는 일본에 대한 긍정 적인 정세관을 곳곳에서 피력하였다. 이는 인종주의(人種主義)에 입각한 대외인식 과 무관하지 않았다. 41) “실제 한국 인민은 러일전쟁 이전까지 호개(好個) 친우로 일본을 좋아했고 한국의 행복을 믿고 있었다. 우리들은 결코 배일사상 같은 것은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러시아를 대신하여 한국 을 탈취해 버리자고 주장하고 그 결과 한국에 이를 그대로 채용하게 되었다. 금 일 내가 이와 같이 몸을 그르치게 된 것도 모두 이등박문의 행위에 기인한다. 러 일전쟁까지는 이천여 만 동포가 종민(從民)임을 기뻐하였다.” 42)라고 주장했다. 그는 을사늑약 이후 일제의 ‘보호정책’이 제대로 시행된다면 한국 독립과 문명 39) 국사편찬위원회, 「境警視의 訊問에 대한 安應七의 供述(제6회, 1909년 12월 3일」, 한국독 립운동사자료 7, 421쪽. 40) 유영렬, 「한말 애국계몽언론의 일본인식」, 한일관계의 미래지향적 인식 , 국학자료원, 2000 참조. 41) 최익현의 경우도 러시아 남하정책에 대항하는 자위수단으로 군사적인 관계 강화를 위한 삼국동맹론을 주장하였다. 「한일의정서」가 체결된 이후 한국지식인들은 일제 침략에 대 응하려는 자세를 모색하기에 이르렀다(유영렬, 「한일관계의 미래지형적 인식 , 국학자료 원, 32쪽). 42) 국사편찬위원회, 「피고 안응칠의 8회 신문조서(1909년 12월 20일)」, 한국독립운동사자료 6, 24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