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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 사 사 / 기 타 군사연구 제128집 191 樞相伊藤公露滿視察)」이란 대동공보 기사를 접하게 되었다. 21) 국내진공작전이 좌절된 이후 새로운 항일투쟁의 방법을 찾고 있던 안중근은 대동공보사 관계자들 에게 자신이 직접 이등박문을 포살할 의도를 내비쳤다. 22) 일제의 보고서에 따르 면, 그는 1910년 10월 10일 유진률(兪鎭律)을 비롯한 정재관(鄭在寬), 윤일병(尹日 炳), 이강, 정순만(鄭順萬), 우덕순(禹德淳) 등과 이등박문 포살을 계획하였다. 안 중근과 우덕순은 임무 수행을 자청하고 나서는 등 매우 적극적인 입장이었다. 이 들은 곧바로 거사를 실행하기 위한 준비작업에 들어갔다. 1909년 10월 21일 유진률로부터 권총 3정과 거사자금을 지원 받은 그는 우덕순 과 함께 하얼빈으로 향했다. 도중에 포그라니치나야에서 유경집(劉敬緝)을 만나 그의 아들 유동하(劉東夏)를 통역으로 대동하였다. 23) 하얼빈에 도착한 후 이강에 게 소개받은 김형재(金衡在)를 통해 조도선(曺道先)을 안내원으로 동참시켰다. 일 행은 김성백(金成伯) 집에서 구체적인 거사 방법과 실행 이후 동지들 보호를 위 한 방안도 세웠다. 24) 안중근은 이등박문이 탑승한 열차가 채가구역에 정차하면 포살한다는 1차 계획 세우고 현장 답사를 마쳤다. 1차 계획이 실패하면 하얼빈에 서 자신이 직접 결행한다는 ‘치밀한’ 계획도 수립했다. 1차 계획은 중국 관헌들의 감시로 실패하고 말았다. 10월 26일 오전 하얼빈역에 도착한 이등박문은 환영식 사열을 마치고 열차로 향했다. 순간 안중근은 권총으로 그를 명중하는 실력을 발휘하였다. 그를 수행하 던 삼태이랑(森泰二郞), 삼괴남(森槐南), 전중(田中) 등에게도 중경상을 입히는 성 과를 거두었다. 25) 그는 현장에서 러시아 군인에게 체포되었지만, ‘대한만세’를 부 르는 등 한국인으로서 당당함과 의연한 자세를 전혀 잃지 않았다. 안중근은 재판과정에서 이등박문 포살은 일제의 침략을 폭로 및 규탄하려는 목 적에서 독자적으로 계획하여 실행한 의병전쟁임을 당당하게 밝혔다. 다만 우리 민족에게는 “언권(言權)이 금지되어 내가 목적한 바 의견을 진술할 도리가 없었 21) 이강훈, 「안중근의사와 독립운동」, 나라사랑 34, 외솔회, 43~44쪽. 22) 국사편찬위원회, 「駐韓日本公使館記錄(憲機 第2634號, 1909년 12월 30일조)」, 한국독립운 동사자료 7, 249쪽. 23) 국사편찬위원회, 「제1회공판시말서(1909년 2월 7일조)」, 한국독립운동사자료 6, 315쪽. 24) 국사편찬위원회, 「駐韓日本公使館記錄(機密統發 第111號)」, 한국독립운동사자료 7, 264쪽. 25) 안중근의사숭모회 편, 안중근의사자서전 , 156~158쪽 : 국사편찬위원회,「聽取書(森泰二 朗, 1909년 11월 15일조)」, 한국독립운동사자료 6, 183~18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