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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중근의 동양평화론과 그 의미 190 군사연구 제128집 연해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국내진공작전도 병행했다. 이는 준비론적인 실력양성 론에서 벗어나 직접적인 무력투쟁에 의한 독립전쟁 모색이었다. 자신이 직접 조 직한 의병부대는 두 번에 걸친 국내진공작전에서 커다란 전과를 올리지 못하였 다. 17) 좌절을 겪으면서 이에 전혀 개의치 않고 지속적인 국권회복을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1909년 1월(음력)에는 연추 하리에서 다시 의병부대를 조직하려고 하였으나 큰 호응을 얻지 못하고 말았다. 그는 음력 1909년 2월 7일 경에 동지 11명과 더불어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를 조직하는 등 국권수호에 목숨을 바치기로 맹세했다. 18) 이들은 왼쪽 무명지를 끊 어 태극기에 ‘대한독립’이라는 글자를 써서 자신들의 결의를 다졌다. 이는 조국광 복을 위하여 목숨까지도 바치겠다는 결연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단지(斷指)의 목적은 대한국(大韓國)의 독립을 꾀하기 위해서이며, 독립할 때까 지는 여하한 방법 수단도 가리지 않고 수행할 생각에서이며, 단지한 것은 작년 12월인가 본년 정월일 것으로 생각하며, 하리(下里)인 김성택(金姓宅)의 전술(前述) 한 여관에서 절단하였다.…(중략)…고로 이등박문을 죽이는 것만이 아니다. 그 가 일본 황제도 속이고 정책을 잘못한 것을 사회에 공표하고 파괴하려고 한 데 있다. 19) 이들은 한국 침략을 진두지휘한 이등박문을 비롯한 식민통치기관의 고위 관료 들을 투쟁 대상으로 삼았다. 초대 통감인 이등박문은 그중 대표적인 척결 대상이 었다. 궁극적인 의도는 불법적이고 야만적인 식민통치 본질을 온 천하에 알려 한 국인의 항일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함이었다. 안중근은 대동공보사 20) 기자로서 강연회 등을 통하여 민족적인 대동단결을 호 소했다. 그의 열성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주한인들로부터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하였다. 이에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들어가 후일을 도모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현지에 도착한 후 그는 이강(李剛)을 방문한 자리에서 「일추상이등공로만시찰(日 17) 윤경로, 「안중근 사상연구; 의병론과 동양평화론을 중심으로」, 민족문화 3, 한성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5. 18) 윤병석, 「안중근의 ‘동의단지회’ 보유」, 한국독립운동사연구 33,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89쪽. 19) 국사편찬위원회, 「境警視의 訊問에 대한 安應七의 供述(第2回)」, 한국독립운동사자료 7, 400~401쪽. 20) 박환, 「대동공보」, 러시아지역의 한인언론과 민족운동 , 경인문화사, 2008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