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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중근의 동양평화론과 그 의미 188 군사연구 제128집 이 글은 안중근의거 100주년에 즈음하여 동양평화론 의 주요 내용과 역사적인 성격 파악에 중점을 두었다. 그는 갑오농민전쟁, 러일전쟁, 을사늑약, 광무황제강 제퇴위, 군대해산, 정미7조약 등 변화무상한 현실을 목도하면서 사립학교설립운 동, 국채보상운동, 의병전쟁 등에 투신하였다. 연해주에서 강연회를 통한 민중계 몽활동도 병행하는 가운데 국권회복을 위한 대동단결(大同團結)을 강조했다. 동의 단지회(同義斷指會) 결성은 중장기적인 독립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비밀결사체’나 다름없었다. 이는 의열투쟁으로 독립전쟁방략의 ‘방향전환’을 의미한다. 다양한 경험과 국내외에서 간행된 서적과 신문 및 잡지 등을 통한 왕성한 독서 는 새로운 정보 획득과 아울러 현실인식을 심화시키는 요인이었다. 동양평화론 은 19세기 말부터 법정투쟁까지 민족운동에 참여하여 경험한 바를 집대성한 현실 인식이자 정세판단의 ‘결정판’임을 누구나 공감한다. 수백 편에 달하는 연구성과 물은 이를 반증한다. 아쉽게도 일제의 약속 위반으로 이를 완성하지 못하고 말았다. 8) 하지만 법정투 쟁 과정에서 남긴 「청취서」와 「신문조서」등을 통하여 궁극적으로 자신이 지향한 바는 상당 부분 개진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한국 독립에만 머물지 않고 ‘인간해 방’이라는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관에 입각한 ‘진정한’ 동양평화를 위한 사상과 방 법론을 제시했다. 반면 일본인들이 주창한 동양평화론은 저들의 ‘야심적인’ 침략을 호도하기 위한 술책에서 비롯되었다. 9)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에 주목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즉 이등박문(伊藤博文) 격살은 살인행위가 아니라 동양평화를 위한 의전(義戰)의 일환이자 새로운 동북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현실적인 대안이었다. II. 동의단지회와 하얼빈의거 안중근은 「을사늑약」이후 기울어져가는 국운을 만회하고자 민족운동에 적극적 8) 「典獄 栗原貞吉의 書翰」(안중근의사기념관 소장). 9) 이성환․이토 유키오 편저, 한국과 이토 히로부미 , 선인, 2009. 여기에 실린 한일 연구자들의 역사인식 편차는 아직까지 상당한 괴리감을 보여준다. 그동 안 활발한 교류는 인식의 간극을 어느 정도 보완하는 등 성과를 거둔 부분도 적지 않다. 다만 독립운동과 식민지배라는 긴장된 관계에 대한 평가는 양극단을 달리고 있다(유재곤, 일제의 한국침략논리와 만국공법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박사학위논문, 1996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