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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트남전쟁시 케산전투 및 안케고개전투 교훈 162 군사연구 제128집 한편 무명고지 전투(4월 13일~24일)는 638고지의 동남쪽을 견제하고 19번 도 로의 감제를 위해 제2대대 6중대 등 3개 중대가 투입되었다. 4월 13일, 제6중대가 공중기동작전을 실시했으나 이 지역의 적정을 파악하지 못해 초기에 손실을 입고 390고지 일대에서 고립되었다. 이에 따라 제5중대가 4월 15일 투입되어 3일 간 다섯 차례의 공격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4월 18일, 390고지를 점령 후 제6중대 와 연결 작전을 실시하여 제6중대는 철수했다. 4월 18일, 제26연대 2중대가 투입 되어 4월 21일까지 390고지 우측 무명고지를 공격했으나 실패하고 재정비 후 4월 24일 철수함으로써 무명고지 전투는 종결되었다. 19번 도로 개통작전(4월 13일~26일)은 제3대대 3개 중대와 제2대대 8중대가 투입되었다. 4월 18일, 서쪽 강점(638고지와 지리산 기지 중간 지점)에는 제3대대 9․10․11중대가, 동쪽 강점(지리산기지와 백두산 기지 중간지점)에는 제2대대 8 중대가 투입되었다. 동쪽 강점은 4월 21일, 서쪽 강점은 4월 24일에 확보 후 4월 26일, 19번 도로의 중요 감제고지에 대한 소탕작전을 전개했다. 또한 제3중대 3소 대(+)가 안케령에서 빈케까지 도로정찰을 함으로써 안케고개 전투는 종료되었다. 한편 북베트남군의 춘계공세도 10만여 명의 많은 피해를 입고 10월초에 중단됐 으나 1968년의 구정공세의 여파와 같이 미군과 남베트남군에 대해 심리적으로 압 박을 가하고 파리평화협정 체결과 결국에는 남베트남의 패망으로 이어졌다. 2. 전투결과 및 교훈 안케고개전투 기간 중 전사한 수도사단 병력은 74명, 부상 104명, 1명이 포로가 되었다. 이는 베트남전 전투 중 국군의 단일 전투로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 고 가장 치열한 전투사례다. 이러한 많은 희생에도 불구하고 케산전투의 다른 의 미는 북베트남군의 춘계공세에 남베트남군이 계속 밀리고 있는 가운데 북베트남 군을 격퇴시킨 연합군 최초의 성공적인 작전이었다. 20) 그러나 안케고개 전투를 통해 정전체제의 지속에 따른 군사대비태세의 이완 우려, 전술준칙의 적용과 중요성을 생각해 보는 측면에서 접근하였다. 여기에서 20) 안케고개전투에 대한 평가는 극명한 대조를 보이고 있다. 참전자의 증언에서도 고급지휘 관은 승리위주로, 전투현장의 초급 간부는 다소 문제점이 많다고 보고 있다. 전투국면을 안케고개전투로 국한한다면 본고에서 언급된 많은 교훈이 도출된다. 적정에 대한 판단과 병력운용, 건제를 무시한 전투현장에서의 지휘관의 독려 등 리더십의 부재 등이다. 한편 북베트남군의 춘계공세와 연계시켜 볼 때 안케고개의 확보는 중부지역 전황에 지대한 영 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