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page

. 전 쟁 사 군사연구 제128집 157 대령은 병력을 증원하지 못했다. 당시 공격징후를 포착 후 랑버이 병력을 케산기 지로 철수했어야만 했다. 넷째, 북베트남군의 기만공세가 주효했다. 즉 미군의 관심을 케산으로 전환시키 고 미군을 인구 밀집지역으로 분리시켜 총 공세시 즉각 지원이 불가능하도록 병 력을 분산시켰다. 북베트남군은 자신들의 승리로 간주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 음과 같다. “이 작전의 승리를 통해 아군의 작전전략이 주효했고 유격전이 최고의 경지에 올랐으며 특히 적을 유인, 분산시킨 뒤 소탕하고 적의 평정음모를 단계적으로 와 해해 위협을 가하는 작전이 매우 성공적이었다. 또한 1968년 4월 15일, 아군은 케 산지역에 대한 주권을 완전히 되찾고 흐엉호아현 전역을 해방시켰다. 케산전투의 결정적 승리로 인해 적 병력을 분산시킬 수 있었고, 1968년 봄 아군이 예상하고 있던 전략적 주공방향을 적이 오인하도록 유도할 수 있었다. 최절정에 달했던 시 점에는 9번 국도 전선에 미 25개 대대를 포함한 32개 대대를 유인하였는데 이는 남부 전역에 배치된 미 전투부대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수치였다.” 14) 결국 케산전투와 구정공세를 통해 북베트남은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 기 위한 군사적 공세를 계속하여 미군을 지치게 만들었다. 미국은 군사적 승리를 더 이상 추구하지 않고 협상으로 전환하게 되고, 3년 후 1972년에 또다시 북베트 남군에게 춘계공세를 허용하게 되었다. Ⅲ. 안케고개전투와 춘계공세 1. 전투경과 국군은 1964년 3월 17일, 미 존슨정부는 베트남 사태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것 을 공식적으로 결정했다. 이어서 미국은 한국 등 25개 우방국에 남베트남 지원을 요청했는데 한국에는 1개 이동외과병원 파병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그해 9월 22 일, 제1이동외과병원과 태권도교관단이 사이공에 도착하여 붕따우에서 임무를 수 행했다. 제2차 파병은 1964년 8월, 동낀만(Dong kin) 사건 발생 후 공병 1개 대대와 14) 앞의 책,『항미전쟁의 종결』, p.1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