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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 쟁 사 군사연구 제128집 155 전쟁의지를 약화시켰고 북베트남이 정치적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으므로 전략적 으로는 성공하였다고 평가되고 있다. 8) 북베트남군은 10만 여 명의 막대한 피해를 입고 격퇴되었으나 불행하게도 미국 이나 남베트남은 이러한 이점을 잘 활용하지 못하고 북베트남군이 전술적 방어로 전환하도록 허용하고 말았다. 결국에는 3년 후 1972년 또다시 춘계공세를 허용하 게 되었다. 미군이 전략적 공세로 전환하지 못한 몇 가지 요인이 있었으나 무엇 보다도 미국 국민의 전쟁의지가 붕괴된 점이다. 즉 미군의 전투의지를 끌어내지 못하고 심리전에서 패배했다. 특히 베트남 전장에서 적의 공격에 의한 패배가 아 니라 비전투원, 즉 전장에 참가하지 않은 언론과 국민들이 전장의 참혹함을 지켜 보고 스스로 무너져 내린 것이다. 당시 언론의 보도내용은 다음과 같으며 증가하 는 전사자 숫자는 반전여론과 병역기피 현상으로 확산되었다. “북베트남군이 케산을 포위하고 있던 77일 동안 미국 텔레비전 방송의 저녁 시 간대 베트남전 보도에서 케산이 차지하는 비중이 1/4이었다. 때로는 CBS는 50% 라는 높은 비율을 유지했고, AP통신은 38%를 케산이야기로 채웠다.” 9) 현대전은 첨단 언론장비로 실시간에 전투현장이 여과없이 안방으로 중계된다. 이를 통해 국익에 부합되지 않는 부분별한 언론보도는 전투현장의 군사적 승리가 전쟁에서의 승리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이유에서 웨스트모얼랜드 장군의 병력증파 요청이 실현되지 못했 다. 즉 현지 사령관인 웨스트모얼랜드 장군은 북베트남군이 이번 공세에서 대패 하였으므로 이 기회에 과감한 공세작전으로 전과를 확대하여 북베트남군의 전쟁 의지를 말살하여야 한다고 하면서 20여만 명의 병력증파를 요청하였다. 이에 대 해 미국의 정책을 결정하는 민간관료들은 병력증파를 반대하면서 남베트남군이 작전을 담당하는 “남베트남화 정책(Vietnamization)”을 주장하였다. 그런데 이러 한 증파논의를 알게 된 언론들이 이를 크게 보도하였는데, 북베트남군이 대패했 다는데 왜 20여만 명의 병력이 더 요구되는 등 반전여론이 비등하였다. 10) 8) 해리서머스 저․민평식 역, 『미국의 월남전 전략』, 병학사, 1983, p.141. 전략 및 전술이 결합되었을 때의 결과는 앞의 책, p.138 <표1>에 잘 나타나 있다. 9) 마이클 매클리어 저․유경찬 역, 『베트남:10,000일의 전쟁』, 을유문화사, 2002, p.348. 10) 나종삼,『월남파병과 국가발전』, 국방군사연구소, 1996, p.65. 당시 미군의 병력은 67년 말 (480,000명), 68년 말(536,040명), 69년 4월 40일(543,482명)에 가장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