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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 역 사 및 역 사 일 반 군사연구 제128집 13 끝으로 우리 육군을 세계에 과시하여 한국군의 우수성을 만방에 떨치고 우리 젊은 장병들에게 진취성을 구비케 한다는 이상론도 작용하였다. 그러나 정계를 중심으로 신중론도 만만치 않았다. 야당은 물론이고 여당의 일 각에서도 적지 않게 신중론을 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나라가 베트남전에 깊숙이 관여한다면 비동맹국과 중립국은 물론이 요, 대 유엔외교에 있어서 호전적인 국가로 인정되어 국제정치사회에서 불리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 둘째, 한국과 월남은 미국과 한국 관계와는 달리 상호방위조약이나 집단안전 보장조약을 맺은 것도 아니고 한국전쟁 때와 같이 유엔의 결의가 있는 것도 아 니다. 셋째, 휴전선을 경계로 북한군과 대치하고 있는 현실에서 전투사단을 파병한다 는 것은 국토방위가 약화된다. 위와 같은 신중론은 사실상 찬성론 못지않게 논리의 타당성을 지니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박정희 대통령과 국군 수뇌부에서는 전투부대 파병을 기정사실로 해 서 착착 준비에 임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적극 반대하고 있던 야당에서도 파 병의 당위성을 인정하는 지도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당시 야당의 거목인 김홍일 장군은 국군 파병을 적극 지지하고 나섰다. 국위를 떨치고 전투경험을 축적하여 세계 일류 군대가 되는 유일한 길이고 국가 경제에 크게 기여한다는 주장이었다. 이어서 박순천 여사 또한 지지 대열에 합류했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역할은 박정희 대통령 자신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국가 와 국군을 위해서는 파병이 불가피하다는 생각이었다. 경제개발계획을 추진 하는데 불가피한 선택이었고 국군 현대화를 성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라 는 것이었다. 역사라는 이름의 대하의 도도한 흐름은 마침내 파병 찬성 쪽으로 기울고 있었 다. 8월 13일에 열린 국회 본회의에서 일부 야당 의원이 퇴장하는 가운데 표결에 들어갔다. 그 결과 찬성 101표, 부결 1표, 기권 2표의 절대 다수표로 전투부대 파 병안이 가결되었다. 드디어 역사적인 전투부대 파병이 결정된 것이다. 이 결정은 대한민국 국군의 우렁찬 전진의 시작이 되었으며 한민족이 세계무대로 도약하는 출발점에 다가서게 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