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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평양전쟁에서의 ‘피의 능선’ 전투 교훈 112 군사연구 제128집 제11항공 함대에서는 기쁜 나머지 쌍발 폭격기 한 대에 선전용 보도반원까지 탑 승시켜 헨더슨 비행장에 호위 전투기 8대와 함께 정찰비행을 보냈다. 이 폭격기 가 헨더슨 비행장 상공에 도착하여 서서히 고도를 낮추면서 비행장에 착륙시도를 하기 위해 진입하려고 하자 비행장 주위에서 기다리던 미군 대공포가 불을 뿜어 일본기는 놀라서 기수를 올렸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일본기는 그대로 비행장 근 처 정글 속에 추락하였다. 10월 29일, 일본군은 후퇴를 결정하고 헨더슨 비행장 주위에서 물러나기 시작 하였다. 가와구치 지대가 피의 능선에서 패하여 잔여 부대가 정글을 통하여 과달 카날의 서쪽과 동쪽으로 퇴각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마루야마의 제2사단은 힘든 정글 길을 통해 많은 병사가 질병과 기아로 쓰러지면서 처참한 모습으로 서쪽의 코쿰보나와 동쪽의 콜리 곶으로 퇴각하였다. 중상을 입은 나쓰소장은 마루야마 중장의 전투 지휘소까지 간신히 와서 숨을 거두었다. 보병 제16연대장 히로야스 (廣安) 대좌도 전사하고 각 대대장 이하 장교 절반이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었다. 일본군의 10월에 벌어진 피의 능선 전투에서만 2,500명 이상이 전사하였고 마 타니코강 전투를 포함하면 3,100명 이상이 전사하였다. 반면 미군은 이 기간 동안 전사 90명과 부상 400여명의 인원 손실을 입었다. 게다가 일본군은 마지막 며칠 동안 미군 진지에 대한 집중적인 공격을 하던 중 100여대 이상이 항공기를 잃어 라바울의 제11항공 함대는 과달카날에 보낼 비행기가 더 이상 없게 되었다. 만약 제3차 공격시 가와구치 소장의 의견이 받아 들여졌더라면 일본군의 10월 전투의 결과는 달라졌을 지도 모른다. 15) 이렇게 일본 육군 제2사단이 주축이 되 어 실시된 제3차 피의 능선 전투는 일본군의 참패로 끝났다. VI. 맺 음 말 1. 피의 능선 전투 결과가 남태평양 전투에 미친 영향 과달카날의 피의 능선에서 일본군은 3차에 걸쳐 미군에 계속 패배함으로써 뉴 기니와 솔로몬 군도 양쪽 전선에서 승리를 예상하였던 일본군의 계획은 수포로 15) 비운의 장군 가와구치는 전쟁이 끝난 뒤 전범 재판에 회부되어 필리핀의 마닐라에서 8년 을 감옥에서 보낸 뒤 1953년 5월에 석방되어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는 부하의 간계에 대 한 분노를 가슴에 품고 1961년 5월, 66세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