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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 쟁 사 군사연구 제128집 105 3. 3차 피의 능선 전투 가. 전투력의 축차투입 이치기 지대와 가와구치 지대가 대본영의 기대와는 달리 미 해병대를 격파하 지 못하고 비행장을 탈환하지 못하자 도쿄의 대본영에서는 과달카날의 중요성을 진지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이에 대본영은 당시 인도네시아의 자바섬에 주둔하고 있던 제16군 산하의 제2사단과 제38사단을 과달카날에 투입하기로 결정하고 이 두 사단을 뉴기니의 라바울로 보냈다. 그 뒤, 라바울에서 과달카날로 이동한 제2 사단은 10월 15일까지 상륙을 완료하였다. 그러나 제17군 사령관 햐쿠다케 하루 요시(百武晴吉) 중장은 앞서 언급하였던 것과 같이 과달카날의 미군 병력을 너무 낮게 추산하였다. 사단장 마루야마 마사오(丸山政男) 중장이 지휘하는 제2사단은 과달카날에 10월 15일까지 상륙을 끝냈으나 제17군 사령관 햐쿠다케 중장은 과달 카날의 미군 병력을 너무 낮게 추산하여 제2사단 병력만으로도 미군을 제압하여 항복받는 데 충분하다고 판단하고는 제38사단은 향후 뉴기니 작전을 위해 라바울 에 잔류시켰다. 당시 라바울에는 일본 육군과 해군 병력 10만명이 주둔하였다. 이때 만약 제38 사단이 제2사단과 함께 과달카날에 투입되어 함께 전투에 참가하였다면 과달카날 전투의 결과는 전혀 다르게 나타났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군은 과달카날 작전 마 지막 단계까지 병력을 축차 투입함으로써 결국 참패하고 말았다. 제2사단의 상륙이 끝난 10월 중순, 제2사단을 기간(基幹)으로 하고 이치기 지대 와 가와구치 지대의 생존자들을 포함하여 과달카날의 일본군은 2만명에 이르렀고 햐쿠다케 중장은 자신이 직접 전투를 지휘하여 미군의 항복을 받을 것을 계획하 였다. 처음에 이치기 지대는 헨더슨 비행장의 동쪽에서 비행장을 공격하다가 실 패한 데 이어 두 번째로 가와구치 지대 역시 과달카날 동쪽 해안에 상륙하여 비 행장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러한 실패 경험을 토대로 햐쿠다케 중장은 이번 비행장에 대한 세 번째 공격에는 이치기 지대나 가와구치 지대보다 훨씬 많 은 병력으로 과달카날 서쪽 해안에서 헨더슨 비행장을 공격하려는 것이었다. 특히, 이번 세 번째 공격은 해군과의 합동작전으로 제17군 참모들은 트럭 환초 를 방문하여 연합함대 지휘관들과 연석회의를 한 결과, 이번 제3차 공격 개시일 을 10월 21일로 계획하고 이에 필요한 준비를 주도면밀하게 추진하였다. 그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