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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평양전쟁에서의 ‘피의 능선’ 전투 교훈 104 군사연구 제128집 9월 12일 밤과 13일 밤에 벌어진 전투에서 미 해병대는 전사 59명, 부상 204명 의 인명 손실을 입었으나 일본군은 장교 28명을 포함한 전사 633명, 부상 505명 의 인명 손실을 입었다. 일본군 쪽은 전투로 부상당했거나 피로에 지친 상태로 식량도 없이 정글에 들어가 과달카날 동쪽과 서쪽에 있는 집결지까지 일주일씩 밀림 속을 걸어가면서 더욱 많은 병사가 쓰러졌다. 일본군이 이틀 밤에 걸쳐 헨 더슨 비행장을 탈취하기 위해 대규모 기습 공격을 하였지만 결과는 실패로 끝나 고 말았다. 라. 에드슨 능선 가와구치 소장은 후일 그의 수기에서, 피의 능선 전투에서 패한 원인은 여러 가지가 원인이 있지만 결국 그 책임은 당시 최고 지휘관이었던 자신이 져야 한다 고 썼다. 남쪽에서 공격하였던 가와구치 부대의 주공부대는 이 전투가 끝난 다음 비행장에서 서쪽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마타니코 강 근처로 정글 속을 헤쳐가야 만 했고 미군은 전투가 끝난 뒤 헨더슨 비행장을 내려다보는 이 능선에 ‘피의 능 선’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피의 능선은 당시 이 곳을 지킨 지휘관의 이름을 따 라서 ‘에드슨 능선’(Edson's Ridge)이라고도 부른다. 이 피의 능선 전투는 여섯 달에 걸친 과달카날 전투 가운데 가장 결정적인 전투로 기록되었다. 그 뒤 일본 군은 이러한 위협적인 공격을 미군에게 하지 못하였다. 한편, 현지 사정을 도쿄의 대본영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제17군 사령부에서는 이치기 지대와 가와구치 지대의 연속 패배에 대해 과달카날을 포기하고 철수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따라서 제17군 사령부의 후다미 아키사부로(二見秋三郞)소 장은 대본영의 분위기를 고려하여 아주 후퇴적인 표현으로 과달카날을 포기하자 는 긴급 전보를 타전하였다. 그러나 대본영에서는 이치기 지대와 가와구치 지대 의 패배는 메이지(明治) 건군 이래 일본 육군의 치욕이라고 생각하며, 이 전보에 대해 격노하고 전보를 보낸 후다미 소장을 경질하여 예편시켜 버렸다. 그 때 대본영에서 제17군 사령부에 파견되어 있던 이모토 구마오(井本熊男) 중 좌도 과달카날 현지 참상에 대해 대본영 육군부가 갖고 있는 감각이 너무 다른 것에 놀라, 앞으로의 작전은 퇴각의 경우도 포함한 신중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전 보를 보냈으나, 대본영 육군부에서는 제국 육군에는 퇴각이라는 문자가 없다면서 이모토 중좌의 전보도 무시해 버렸다. 과달카날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대본영 육 군부에서는 과달카날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참모가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