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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트남전쟁 파병의 역사적 의의 12 군사연구 제128집 이 공한을 받은 우리 정부는 전투부대 파병에 대한 일반적인 원칙을 세우고 관 계 부서에서 활발한 준비를 서두르게 하였다. 미국의 파병 요청도 중요하지만 국 가 간 당사국인 월남공화국의 파병요청 또한 명분상 필수적인 과정의 하나였다. 우리나라의 모든 신문은 일제히 이 사실을 대서특필하여 보도하기 시작했으며 온 국민은 찬반양론의 토론이 일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이 전투부대 파병을 위한 여러 가지 조치가 준비되는 동안 월남정부는 재차 지원요청을 호소하는 공한을 보내왔는데 이는 월남정부에 정치적인 변혁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쿠데타가 일 어나 공군준장인 구엔 카오 키 수상이 등장한 것이다. 우리 정부나 정치인, 심지어 국민들 사이에서도 전투부대 파병은 긍정하면서도 월남공화국의 정치적인 불안을 늘 염려하고 있었다. 이 무렵 미국의 파병 요청 또한 집요했다. 심지어 한국군 파병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휴전선에 배치한 미 군 사단을 베트남전선에 전환 투입할 수밖에 없다는 은근한 압력까지 서슴지 않 았다. 우리 육군은 전투부대 파병을 기정사실로 보고 실무진에서는 전투부대 파 병을 위한 제반 준비를 은밀히 서두르고 있었다. 육군본부에서 전투부대 파병을 적극 지지한 이유는 다음과 같은 사유에서였다. 첫째, 육군의 현대화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을 가장 중시하고 있었다. 우리 국 가의 경제력으로는 당시 현대화능력이 없었다. 우리 육군의 모든 장비는 2차세계 대전시 장비 그대로였다. 개인화기에 있어서도 미군은 자동소총인 M14에서 M16 으로 발전해 장비(裝備)하고 있었는데 우리는 반자동인 M1소총이 고작이었고 공 용화기 또한 모두 노후화되어 있었는가 하면 기동장비를 비롯한 지원 장비 모두 가 낙후될 대로 낙후되어 있었다. 심지어 보병 대대장의 지휘용 차량도 고장 나 기 일쑤였다. 둘째, 실전 경험을 통해 북한군보다 우위의 전투력을 구비하자는 것이었다. 당시 휴전선에서는 소수의 북한군 또는 공비가 은밀히 침투하여 곳곳에서 교란 을 시도하고 있었는데 그때마다 육군본부에서는 전투경험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셋째, 만일 한국군 대신 미군 사단이 베트남전에 전환 투입된다면 한국방어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는 위기의식도 작용하였다. 넷째, 한국 전쟁시 미군의 참전으로 공산군을 격퇴시켰는데 그 은혜에 대한 보 답을 해야 한다는 명분론도 상당히 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