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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광무 4) 고종은 원수부(元帥府)에 명하여 을미사변(乙未事變) 때 순국한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洪啓薰) 이하 여러 장병을 제사지내는 단(壇)을 설치하도록 하였다. 원수부는 전에 남소영(南小營)이 있던 현 위치에 단을 설치하였고, 고종이 장충단이라 명명하는 한편 장례원(掌禮院)으로 하여금 매년 춘추로 제사지내게 하였다. 그러자 이듬해 육군법원장 백성기(白性基)가 상소하기를 "임오군란에 희생된 영의정 이최응(李最應), 판서 김보현(金輔鉉) ·민겸호(閔謙鎬), 참판 민창식(閔昌植)과 갑신정변의 희생자 찬성(贊成) 민태호(閔台鎬), 판서 조영하(趙寧夏) ·민영직(閔泳稷), 참판 윤태준(尹泰駿) ·이조연(李祖淵), 중관(中官) 유재현(柳載鉉) 및 을미사변에 희생된 궁내부 대신 이경직(李耕稙), 시종(侍從) 임최수(林最洙), 참령(參領) 이도철(李道徹) 등도 전사한 장병 못지 않은 순국 충렬의 인사이니 마땅히 제향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자 고종은 이를 받아들여 함께 장충단에 제향하도록 하였다. [출처] 장충단 [奬忠壇 ] | 네이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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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8월 일제에 의해 혁파되었고, 1920년대부터 일제는 이곳을 공원화하면서 동시에 상해사변 당시 일본군인 결사대로 전사한 육탄삼용사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혼을 달래기 위한 박문사(博文寺)를 설치하여 그들의 영혼을 위로하였음. 해방 후 박문사가 철거되었고, 1910년 이후 일제가 뽑아버렸던 비신을 광복 이후 찾아서 영빈관(현 신라호텔 자리) 안에 세웠고, 1969년 지금의 자리인 수표교(水標橋,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8호) 서쪽으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