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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즉 여성에게 사회생활이 아니라 딸, 아내, 어머니로서의 가정 내 역할을 강조하고 승려가 되는 것 역시 종교적 성취보다는 이 역할의 연장선으로 남편에 대한 정절 측면 을 중시하는 관념이 있었던 것이다. 왕이 그녀에게 시호를 내린 이유는‘절의가 한결같았음’ 을 칭찬해서다. 국가 입장에서 보면 그 녀는 세속에 있을 때 딸과 아내,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잘 했으며 남편 사후에는 출가, 수행하며 정절을 지켰다. 몸을 마칠 때가 되자 아들 가까이에 살며 끝까지 불교에서 가르치는 부녀자로서 의 도리를 다하였다. 그야말로 당시 국가와 사회가 여성에게 요구하는 가장 이상적인 삶을 구현 해냈던 것이다. 그러나 만일 승려로서의 활동이 미미했다면 국가에서 그녀에게 대사직을 내려주 지는 않았을 것이다. 승려가 된 다른 여성들도 있는데 오직 그녀에게만 승직을 내려줬다는 것은 그녀의 승려로서의 활동이 상당한 업적이 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비록 사료가 없어 아쉬움이 크지만 그녀는 의심할 여지없이 고려시대 가장 훌륭한 비구니 중의 한 명이었을 것이다. 그녀의 존재는 고려시대 불교에서 여성의 위상과 한계를 잘 보여준다 하겠다. 참고문헌 김영미, “신라 불교사에 나타난 여성의 신앙생활과 승려들의 여성관” , 『여성신학논집1』 , 1995 김영미, “불교의 수용과 여성의 삶·의식세계의 변화 - 고려시대 여성의 가정생활을 중심으로” , 『역사교육 62』 , 1997 김영미, “고려시대 여성의 출가” , 『이화사학연구 25·26』 , 1999 김영미, “고려시대 비구니의 활동과 사회적 지위” , 『한국문화연구 1』 , 2001 김영미, “고려 진각국사 혜심의 여성성불론” , 『이화사학연구 30』 , 2003 김두진, “나말여초의 선종산문과 그 사상의 변화” , 『신라문화 27』 한국여성불교연합회 편, 『불교의 여성론』 , 불교시대사, 1993 리영자, 『불교와 여성』 , 민족사, 2001 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