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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승불교 경전으로 승만부인은 재가신자로서 대승을 깨 닫고 이를 설법, 실천한 불교의 성인이다. 이처럼 신 라시대불교에서는 여성을 차별하지 않았고 비구니집 단을 통솔하는 도유나랑을 두어 여성에게도 승직을 허락했다. 그런데 삼국통일 이후 전쟁이 사라지고 절 대왕권이 구축되면서 점차 여성의 종교적 역할과 지 위에 변화가 왔다. 삼국시대에는 전쟁기라 여성의 힘 까지 최대한 동원하기 위해 불교의 가정윤리가 상대 적으로 덜 강조되었으나 통일 이후 그럴 필요가 없어 지면서 여성은 다시 가정 내 존재가 되었다. 현일이나 원효, 경흥 등 여러 승려들이 여성 성불의 어려움을 말했고, 어느 틈엔가 도유나랑도 없어졌다. 이제 여성 들은 수행을 통한 성불보다 가족의 안녕과 내세에 대 한 기원에 몰두하게 되었다. 신라 말이 되면 선종이 유행한다. 선종은 처음에는 자기 안의 불성을 깨달으려는 내증(內證)이 중심이었 으나 차츰 이타행을 실천하는 외화(外化)가 강조되었다. 외화는 결국 당대 사회의 교화, 즉 전란 에 휩싸인 국토를 구제할 방법을 제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선승들은 왕실 혹은 호족들에게 자 문을 하며 차츰 이들과 결합해갔다. 왕건이 고려를 세우고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은 한편 승려 를 포섭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왕건은 적극적으로 승려들을 포용하고 불교계를 통합, 정비해갔 다. 후대 왕들도 이에 동참하여 승과와 승직제도를 통해 이들을 통제했다. 이제 승려는 국가의 시 험을 통해 선발되어 국가의 녹을 받는 관인이 되었다. 승직은 오직 남성의 전유물이었고 여성의 신앙은 점점 더 개인적 차원의 것이 되어버렸다. 여기서 특기할 점은 그녀가 승려가 되었음에도 원래 갖고 있던 양천군대부인이라는 봉작이 없 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심지어 군대부인(정4품)에서 국대부인(정3품)으로 벼슬을 올리기까지 하였다. 이는 다른 여성들의 경우에도 다르지 않다. ‘삼한국대부인 염씨 묘철’ 이나‘순성옹주 묘 령’등으로 승려가 되어도 속세의 명칭을 떼지 않았다. 또 혜비와 신비는 공민왕 사후 비구니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금석문에 대공덕주(大功德主)로 기록되어 있을 뿐 비구니로서의 법명조차 적혀있지 않다. 이는 결국 당시 사회가 여성의 수도를 수절의 일환으로 생각하는 사고와 무관하 밀양고려벽화(묘가 사적 459호) 밀양고려벽화(묘가 사적 459호)밀양시 청도면 고법리 벽화 고분으로 송은(松隱) 박익(朴翊. 1332-1398) 묘에서 발견됨. 불공 드리러 가는 고려시대 여성들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 는 벽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