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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을 외웠다. 숨이 거의 넘어갈 즈음에도 염불하는 입술 이 멈추지 않았고 완전히 숨이 넘어간 뒤에야 합장한 손이 흐트러졌다. 이처럼 박씨가 임종 직전에 출가 형 식을 취한 이유는, 출가하여 수행하면 그 공덕으로 하 늘에 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즉 출가가 구도 (求道)보다도 극락왕생에 비중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 나 진혜대사는 이 수준을 넘어 진정한 불가인으로서 구도하는 길을 택했다. I 여성 최초로 승직을 받다 I 열심히 수행 정진하던 그녀는 충숙왕 7년(1320) 장남의 집 근처인 개성 남산의 남쪽에 초당(草 堂)을 짓고 머물렀다. 묘지명의 표현을 빌자면, 지아비가 죽으면 아들을 따른다는 교훈을 본받고 자 한 것이라 한다. 삼종지도는 유교만이 아니라 불교에서도 이야기하고 있다. 초기의 대승경전 인 <대지도론>에서는“여인의 예는 어려서는 부모를 따르고, 젊어서는 남편을 따르고, 늙어서는 아들을 따른다” 고 했다. 본래 비구니들의 계율에는 비구와 비구니가 따로 거주하지만 비구의 절 에 한낮 이전에 왕래할 수 있는 곳에 위치해야 했다. 즉 남성의 보호와 통제가 있었던 것이다. 그 녀가 아들 곁에 머문 것은 계율에도 맞고 불교의 여성윤리에도 충실한 행위였던 것이다. 충숙왕 11년(1324) 병이 들어 세상을 뜨니 향년 70세였다. 임종할 때에도 말하는 것이 어지럽지 않고 행동이 평소와 같았다. 담당 관리가 부음을 알리니 임금이 그 절의가 한결같음을 찬탄하고, ‘변한국대부인 진혜대사’ 로 추봉하였다. 대사는 승과에 합격한 후 받는 대덕(大德)보다 한 단계 위의 승계이다. 이는 사후에 주어진 시호이므로 한계는 있지만 고려 5백년을 통해 비구니로서 대 사 호칭을 받은 유일한 사례이다. 왜 이렇게 승직을 받은 여성들이 없는 것일까. 삼국시대에도 마 찬가지였을까. 신라왕실에서는 불교로 왕권의 신성화를 꾀했고 여성이라고 예외를 두지 않았다. 예컨대 선덕 여왕의 시호인 선덕은 불교의 이상적인 정복군주 아쇼카왕의 전생 이름이었다는 점에서 선덕여 왕의 지향점 및 당시 신라사람들의 여왕에 대한 평가를 짐작할 수 있다. 진덕여왕의 이름 승만은 <승만경>의 주인공 승만부인에서 따왔다. <승만경>은 여인즉신성불설을 이야기하는 대표적인 대 [최서 처 박씨 묘지명] 초대 제주목사를 지낸 최서의 부인 무안 박씨(1249-1318) 의 묘지명이다. 묘지명에는 합장한 채 염불하며 임종을 맞이한 사실 등 박씨의 독실한 신앙을 기록하고 있다. (다시 보는 역사편지 / 고려묘지명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