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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I 남다른 승려의 길 I 그녀 역시 아내와 어머니의 길을 걸었고 이 역할에 충실했다. 그러나 남편 사후 그녀는 여성으 로서의 많은 책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신앙을 더욱 돈독히 했다. 충렬왕 28년 (1302) 중국에서 무선사(無禪師)가 오자 그를 만나 공경하며 처음으로 법요(法要)를 들었다. 또 충 렬왕 30년(1304)에 철산화상(鐵山和尙)이 강남에서 와 교화를 베풀자 나아가 대승계를 받기도 했 다. 뿐만 아니라 충선왕 3년(1311)에는 미륵대원(충북 미륵사지로 추정)에 가서 장육석불에게 예 를 올리고, 여러 산천을 순례하면서 열반산(위치 미상)과 청량산(경북 봉화군)의 성스러운 유적지 까지 갔다. 충숙왕 2년(1315)에는 마침내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어 법명을 성효(性曉)라 했다. 이제 그녀 는 속세의 연을 벗어나 오직 불사와 신심을 쌓는 데만 진력할 수 있었다. 실제로 그녀는 남편 사 후 초하루와 보름의 제사에는 반드시 몸소 묘소에 갔으며 3년 상을 치르면서 아무리 춥거나 더워 도 게을리 하지 않았고, 그 뒤에도 명절 때도 반드시 묘소에 갔었다. 그러나 승려가 된 뒤에는 그 렇게 하지 않았다. 승려로서 그녀의 성지 순례는 보다 활발해졌다. 충숙왕 3년(1316)에 통도사에 가서 사리 12매를 얻고 계림으로 가 여러 유적을 마음껏 보고 돌아왔으며, 이 외에도 다닌 산천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이 산에서 저 산의 사찰로 옮겨가면서 수행하는 것은 큰 스님들의 불적 쌓기 행적이다. 승려 탄문도 원효와 의상의 발자취를 찾아 수련했고 다른 승려들도 성지순례를 했지만 누구도 그녀만큼 열심히 답사를 했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이는 그녀가 얼마나 열정 적으로 종교 활동을 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성지순례 외에 또 다른 종교적 역할이나 성취도 있었을 것이다. 고려 후기 선사들은 여성의 출 가와 수행에 상대적으로 긍정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진각국사 혜심이나 나옹화상, 보우 등 선사들의 비석에는 제자들을 기록하면서 비구니 항목을 독립적으로 설정하고 있다. 이는 아예 비구니 제자의 이름이 없는 다른 승려들의 비문과 비교해 볼 때 상당히 다른 점이다. 또 진각국사 혜심 문하의 비구니들은 수선사의 하안거에 참석해 참선하는 등 비구니들의 수도와 성불 노력 에도 긍정적이었던 것이다. 이를 볼 때 그녀 역시 열심히 참선 수행하며, 불교의 성지를 찾아다니 며 진리를 찾고자 노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다른 여성들과 무엇이 다른가. 묘지명에서 출가한 여성들을 찾아보면 임종 직전에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컨대 최서 처 박씨(?-1318)는 불교를 독실히 믿었는데 병이 위독하자 승려 를 청해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법명을 성공(省空)이라 했다. 죽음이 임박하자 합장하고 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