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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병으로 죽었다. 김유신 처 이씨(?-1192)는 어려서부터 불교를 믿어 남의 잘잘못을 말하지 않았 다. 혼인한 뒤에는 항상 불경을 읽고 오후에는 음식을 먹지 않았으며 십재일(十齋日)에는 고기를 먹지 않으면서 정토에 태어날 것을 맹세하였다. 병이 들어 15일째 되던 날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 입고 입으로 아미타불을 외우며 세상을 떠났다. 이처럼 여성들이 독실한 신앙을 가졌으면서도 재가신자로 만족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불 교에서 여성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와 연관된다. 석가모니가 불교를 창시했을 때, 처음부터 구원 받아야 할 중생에 남녀의 차별을 두지는 않았다. 그러나 인도사회의 낮은 여성 지위가 종교에 영 향을 주어 점차 여성의 성불 가능성 자체를 인정하지 않게 되었다. 즉 여성은 번뇌가 많아 전륜성 왕·범천왕·제석천왕·마왕·삼계법왕이 될 수 없다는 오애설(五碍說)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 러나 부처님 당시의 불교로 돌아가자는 혁신운동(대승불교)이 일어나면서 여성 성불에 대한 견해 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여성도 남성의 몸으로 변하면 성불할 수 있다는‘변성남자설’ 을 거쳐 여 성의 몸 그대로 부처가 될 수 있다는‘즉신성불설’ 로 바뀌게 된다. 이는 공(空)사상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 결과이다. 즉 일체의 제법은 정해진 특징(定相)이 없으므로, 남자와 여자라는 구별 자체도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처음부터 대승불교를 수용했으므로 여성도 부처가 될 수 있는가가 논란이 되지는 않았 다. 그러나 불교 역시 가부장적 사회 속에서 여성을 가정 내 존재로 보고 있다. 원시불교의 경전 에서는 여성들이 성을 잘 내고 질투가 심하고 물건을 아끼고 어리석어 직업에 종사할 수 없다고 말한다. 즉 여성이 출가해 수행을 하는 것보다는 가정 내 역할에 충실하도록 기대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국가 차원에서도 노동력 재생산이라는 측면에서 여성들이 승려가 되는 것을 달가워하 지 않았을 것이다. 혹 과부라면 모르겠지만 혼인을 하지 않은 처녀가 승려가 되는 것은 국가입장 에서 그리 바람직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귀족들은 자신의 딸이 다른 가문과 연합을 이루는 중 요한 매개자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절에 들어가는 것을 탐탁해하지 않았다. 아들이라면 사원 세력을 장악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어 오히려 환영할 일이겠으나 딸은 경우가 달랐다. 여성이 남 들에게 추앙받고 국가로부터 상을 받는 경우는 부모에게 효도하거나 남편에게 정절을 지켰을 때 였다. 혹은 남편이나 자식이 큰 공을 세우거나 고위 관료가 되었을 때도‘국대부인’등 벼슬을 받 을 수 있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여성들은 승려가 되는 것보다는 어머니나 아내로서의 길을 택했 을 것으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