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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신하였다 한다. 14세에 언양 김씨가문의 김변( )과 혼인했다. 시집 역시 대단한 가문으로 여 러 대에 걸쳐 재상이 배출되었다. 그녀의 남편 김변은 16세에 조상의 음덕(음서)으로 관직에 나가 21세에 다시 과거에 급제했다. 성품이 순박하며 온후하고 꾸밈이 없었으며 벼슬살이에 정도(正 道)로 임해 재상의 지위에 이르렀어도 견책을 받을 만한 조그마한 잘못조차 없었다 한다. 그녀는 혼인 뒤 남편을 섬기고 음식이나 길쌈에 힘쓰면서 아내의 도리를 다하였다. 어머니가 되어서는 자식을 각자 마땅한 업(業)으로 가르쳤다. 그녀는“남자가 삼가고 경계하지 않으면 음험 하고 부정하게 되며, 여자가 삼가고 경계하지 않으면 도리에 벗어나고 편벽해 진다” 며 경계하였 다. 이는 그녀가 불교 윤리를 생활 속에서 실천했음을 보여준다. 불교 경전에서는 여성들에게 아 내로서의 도리를 벗어나지 않으며 아내의 의무를 부지런히 솜씨있게 수행할 것을 강조했다. 또 자식을 보살펴 악행을 못하게 하거나 기능을 학습시키라는 가르침도 있어 그녀가 이를 충실히 지 켰음을 보여준다. 그녀는 아들 네 명과 딸 세 명을 낳아 모두 훌륭히 키웠는데, 아들 둘은 승려가 되었다. 3남은 어려서 출가하여 현변( )이라 했는데 청오대사(淸悟大師)로 감은사 주지였으 며, 4남도 어려서 출가하여 여찬(如璨)이라 하고 가지산문에 투신하여 선사(禪師)가 되었다. 충렬왕 27년(1301)에 남편이 죽자 그녀는 나라에서 베푸는 의식을 사양하고 스스로 장례도구를 마련하여 대덕산의 남쪽 언덕에 묘소를 마련하였다. 장례가 끝나자 묘지 가까이에 집을 짓고 또 부근에 감응사(感應寺)를 지어 남편의 명복을 빌었다. 집안의 재화와 보물을 모두 털어 금과 은 글씨로『원둔경(圓頓經)』 을 사경(寫經)하고 이 외에도 많은 불사(佛事)를 일으켰다. 불교에서는 살 아서 착한 일을 하지 못한 사람이라도 죽은 후 자손을 비롯한 타인의 추선(追善)에 의해 하늘이나 인간세계에 태어나거나 윤회하지 않는 극락에 날 수 있다고 믿었다. 이에 죽은 부모나 남편을 위 해 사경, 시주를 하는 것은 매우 중요했다. 이 역시 그녀의 깊은 불심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런데 독실한 불교신자이면서 왜 그녀는 남자들이 앞 다퉈 승려가 되듯 일찌기 승려가 될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그녀뿐이 아니다. 여성들의 묘지명을 보면 실제로 승려가 된 사람들이 별로 눈에 띠지 않는다. 예컨대 인종의 외손녀인 왕영의 딸(?-1186)은 항상 <화엄경> 등 불경을 읽는 것으로 일과를 삼으며 정토 에 태어나기를 구하였다. 그러나 승려가 되지 않았고 혼인도 하지 않은 채 아버지를 정성껏 섬기다 36세에 117 [대방광불화엄경] 충정왕2년(1350) 연안군부인 이씨가 남편과 친정부모의 명복 을 빌기 위해 시주하여 이루어진 사경이다. 불경을 금글씨로 베껴쓴 것으로 고려시대 여성의 불교신앙과 당시 여성의 재산 존재를 알 수 있다. (빛깔있는 책들 / 대원사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