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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 와 자기 딸, 전처 아들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와 살았다. 강완숙은 자신의 신앙생활을 위해 남편 중심의 가부장적인 가족제도를 벗어나 과감하게 서울 행을 시도한 것이다. 그녀의 서울 상경 동기에 대해서도 여러 설이 있다. 금욕생활을 하고 싶은 마음에서 그랬다는 사람도 있고 그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천주교인들 사이에서 살고 싶은 마음에 그랬다는 사람 도 있고 남편에게 쫓겨났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시어머니와 자식들이 함께 이주한 것으로 보아 무조건 쫓겨난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문제 때문에 남편과 사이가 좋지 않아 별거를 했던 것 으로 보인다. 서울로 올라온 강완숙은 시어머니와 자녀들을 보살피며 보다 적극적으로 신앙생활을 했다. 강 완숙은 주문모 신부 곁에서 교회 일을 도왔고 주신부는 그녀의 영리함과 성실함을 인정하여 콜롬 바라는 세례명을 주기도 했다. 주문모는 강완숙을 조선 교회 최초 여회장으로 추대해 여성 전도 를 담당케 했고 강완숙의 투입으로 여성 신도들이 많이 늘어났다. 결국 강완숙은 1801년 신해박 해 때 죽음을 당했다. I 죽음을 각오하고 신앙을 지키다 I 주문모 신부의 은닉과 보호 강완숙의 활동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이 몰래 조선으로 잠입한 중국인 신부 주문모를 숨겨주면 서 포교를 도왔다는 점이다. 주문모는 1752년에 중국에서 태어난 신부 로 천주교 신부로는 최초로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한 사람이다. 그는 1794년 당시 베이징 교구장인 구베아 주교에 의해 조선에서 선교활동 을 전담할 선교사로 임명됐다. 그리고 그해 12월에 조선의 천주교 신자 인 윤유일 등의 안내로 조선에 입국했다. 이듬해 정월 서울에 잠입한 그 는 역관 최인길의 북촌(계동) 집에 은거했다. 주문모는 이곳을 근거지로 삼아 조선 최초로 미사를 집전하고 세례를 주는 등 반 년간 별다른 어려 움 없이 선교활동을 수행하며 수많은 신도들을 만났다. 이때 교회 일에 헌신적이었던 강완숙은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고 주신부는 강완 숙에게 여신도들을 가르치는 일을 맡을 여회장의 직책을 맡긴 것이다. 최초로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한 주문모 신부 초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