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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 주교를 추종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주자학만이 진리가 아니며 서양의 학문이 우리보다 우수한 것 이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남인들은 신앙조직을 만들고 포교에 들어갔는데 불우한 처지의 양 반이나 중인 그리고 일부 유식한 평민들이 입교했다. 이와 같이 서양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에 천 주교가 퍼져나간 것은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이들은 오늘날 서울 명동성당이 자리하고 있는 명례방이란 곳에 모여서 공부를 했다. 명례방에 는 이벽을 통해 1784년에 천주교를 접한 역관집안 출신 김범우의 집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교리 공부와 기도 모임이 이루어졌다. 즉, 그의 집은 최초의 신앙공동체가 설립된 곳인 셈이다. 그러나 천주교는 임금에 대한 충성과 부모에 대한 효를 절대적으로 중요시하는 성리학에 위배되는 점이 많았다. 임금보다는 천주를 제사보다는 기도를 우선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듬해 형조에서 천주 교도들을 적발했고 잡혀간 김범우는 첫 번째 순교자가 됐다. 이후 신도들은 주문모 신부를 영입하는 등 조직적 인 교회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점점 신도들이 많이 늘 어남에 따라 지배층의 공격의 목소리도 높아졌다. 하 지만 이런 상황에 대해 정조는“사교(邪敎)는 저절로 일어났다가 저절로 없어질 것이며 유학의 진흥에 의 해 막을 수 있다” 고 하면서 적극적으로 박해를 가하지 는 않았다. 이러한 배경에는 남인 시파의 실권자인 채 제공의 영향도 있었다. 그러나 진산에 사는 선비 윤지 충이 어머니 제사에 신주를 없애는 반유교적 행위를 하자 그를 사형에 처하고 천주교를 탄압했다. 한편 천주 앞에 누구나 평등하다는 천주교의 사상 은 가부장적 유교 윤리에 억압받던 천민이나 여성들 에게 구원의 빛으로 받아들여졌다. 천주교는 특히 불 평등한 봉건적 가부장제 속에 놓여 있던 여성들이 자 의식을 갖게 하는 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신도들 중 에는 용감하게 유교사회 체제를 이탈해 활동하는 사 람이 많았는데 이 중 여성 신도 수 증가에 큰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강완숙이다. 한국 순교자 103위 성인화 남녀가 커튼을 사이에 두고 미사를 보는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