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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 발형(髮型)은 뒤쪽에 가체(加 )한 것으로 보이며, 뒷머리 밑부분은 단발모양으로 가지런하게 다듬고 있 다.33) 이는 머리를 아래로 드리운 쌍수계로 보인다. 신은 목이 없는 낮은 것을 신고 있다. 한치윤의『해 동역사(海東轢死)』 에서는“고려시대 말(襪)과 이(履)는 포(布)와 위(韋)로써 발에 맞추어 신었으며 묶지 않았 다. 말(襪)은 포(布)를 사용하였고, 이(履)는 천한사람은 소가죽을 사용하였고, 귀한사람은 사슴가죽을 사용하 였다” 라고 한 것에 비추어 볼 때 여자들의 낮은 신은 가죽으로 만든 이(履)로 생각된다. 왼쪽의 남자는 두식(頭飾)에서부터 신발에 이르기까 지 모두 관찰이 가능하나, 오른쪽의 남자는 머리부분 이 훼손되었다. 그러나 여자 두 명의 복식이 같고 화 관의 크기에 약간의 차이만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왼쪽의 남자 모습으로 훼손된 오른쪽 남자의 머리 부분을 짐작하여도 무방할 듯 하다. 깃이 둥근 단령(團領)을 두 남자가 모두 입고 있다. 옷길이가 발목에 닿고 우임(右 )이며 앞중심선이 있 다. 단령은 진덕왕(眞德王) 2년 김춘추(金春秋)가 당에 서 사여(賜與) 받아 입기 시작한 의복으로 고려말 관 복화 되었다.34) 옆트임이 있으며, 손과 들고 있는 그릇에 가려 잘 보이진 않으나 옆에 있는 남자의 허리에 대(帶)가 있 는 것으로 보아, 이 사람도 대(帶)를 하고 있음이 확실 하다. 넓고 장식이 있는 대(帶)는 아니나 가는 띠도 아 닌 적당한 넓이의 포대(布帶)로 보인다. 당시 고려말 조선초에 입었던 공복으로서의 단령에 비해 소매가 좁은 착수(窄袖)이다. 또한 당시 단령에 복두( 頭)를 많이 착용하였으나, 특이하게도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 지는 마름모꼴에 테가 있는 관모를 착용하고 있다. 이 러한 관모류는 우리나라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형태 는 아니나, 중국 나라의 복장에서 이와 유사한 모자(사 방와령모-四方瓦楞帽)를 발견할 수 있다(그림 10).35) 단령과 관모의 안을 붉은 천으로 댄 듯, 관모의 테 부분과 단령의 옆트임에 붉게 채색한 것을 볼 수 있다. 신은 고려 관리가 단령에 목화(木靴)를 신은 것과 마찬 가지로 발목위로 올라오는 목화(木靴)를 신고 있다. 2. 남동(南東)쪽 단벽(短壁)의 벽화 말 고삐를 잡고 있는 남자 두 명이 서로 마주 보고 있다. 이들은 죽은 자를 극락(極樂)으로 인도하는 사자 (使者)이다. 서로 같은 복장을 하고 있다. 서쪽 벽의 벽화에 나타난 남자가 단령을 입은 것과 는 달리 포(袍)를 입고 있다. 옷길이도 약간 더 짧아 무릎 아래에 닿는다. 임( )은 마찬가지로 우임(右 )이 다. 오른쪽의 남자는 깃이 붉은색으로 되어 있으나 왼 쪽의 남자는 채색이 벗겨진 것인지 원래 붉은색이 아 니었는지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단령과 마찬가지로 중 심선이 있고 옆트임이 있으며 허리에는 포백대(布帛 帶)를 나비리본 형태로 매어 그 끈을 무릎까지 늘여 뜨렸다. 소매는 직배래형의 착수(窄袖)이며, 머리에는 발립 ( 笠)을 착용하였다. 고려시대의 초상화 중 이조년상 (李兆年像)과 이포상(李褒像)도 중거형의 포에 발립( 笠)을 착용하고 있다. 모두 우임(右 )이다. 대(帶)에 있 111 曺五順·劉珠利/密陽 古法里 古墳壁畵에 나타난 服飾 硏究 <그림 8> 서북쪽 장벽의 벽화 <그림 9> 방배동 출토 여자 목우상 <그림 10> 시종이 사방와령모를 들고 있는 모습 [事林廣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