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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이다. 불교를 믿으면 죽은 뒤 아미타 보살이 극락 (極樂)으로 데려간다는 사상이다. 말 고삐를 잡고 마주 보고 있는 두 명의 남자는 사자(使者)이다. 고분벽화에 서는 죽은 자가 내세로 타고 갈 수 있는 물건으로서 배와 말을 그리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서는 말을 그리 고 있는 것이다. 내세는 먼 바다 저편에 있고, 특히 말 을 필요로 할 만큼 대단히 먼 곳이라고 생각하고 있었 던 것이다.20) 즉 이 공양행렬도는 박익을 극락으로 천 도하길 기원하는 마음이 담겨있는 극락 천도 행렬인 것이다.21) 벽화와 함께 발굴된 유물로는 지석(誌石)과 화문석 (花紋石), 은제수저 1벌, 황송통보(皇宋通寶)와 홍무통 보(洪武通寶), 분청사기 사발 1점과 녹유토기 1점 등이 있다. 3. 송은(松隱) 박익(朴翊) 선생 송은 박익 선생은 신라 시조왕(始祖王) 박혁거세(朴 赫居世)를 시조로 하는 신라 밀성대군(密城大君)의 후 예로서 중조(中祖) 휘(諱) 언부(彦孚)의 8세주손(八世胄 孫)이다. 선생은 서기 1332년 임신년(壬申年) 7월 27일, 지금 의 밀양시 북부면 삽포리 향제(鄕第)에서 태어났다. 자 (字)는 태시(太始), 휘(諱)는 익(翊)이나 초휘(初諱)는 천 익(天翊)이며 시호(諡號)는 충숙(忠肅)으로 송은(松隱)은 호(號)이다. 공민왕(恭愍王) 2년, 서기 1352년에 지공거(知貢擧) 허백(許伯), 동지공거(同知貢擧) 이곡(李穀)의 밑에서 과 거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예의사총랑(禮儀司摠郞),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 직제학(直提學) 등을 거쳐 공 양왕(恭讓王)때 잠시나마 예조판서(禮曹判書)로 있었다. 이성계(李成桂) 휘하에서 홍건적의 침략군과 북원 (北元)의 나하추와 여진 등을 격퇴하는데 많은 전공을 세웠고, 우왕(禑王)때는 도순찰사(都巡察使) 이성계의 막하에서 왜구를 토벌하여 전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리고 선생은 당대의 이름난 목은(牧隱) 이색(李穡),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성부(誠夫) 박상충(朴尙衷),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삼우당(三憂堂) 문익점(文益 漸) 등과 함께 교분을 나눈 절개가 깊은 학자의 한 분 이었다. 그러나 고려의 운수가 다하여 정치가 날로 잘 못되는 것을 보고, 선생은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 아와서 마을 어귀에 솔을 심어 마을 이름을 송계(松 溪)라 고치고 휘를 익(翊)이라 바꾸어 스스로 송은이라 부르며 시(詩)와 서(書)로 마음을 달래고 술과 거문고 로 세월을 보냈으니, 이것은 비록 몸은 고향으로 돌아 왔지만은 마음은 고려의 상징인 송경(松京)과 송악(松 嶽)을 잊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공양왕 임신년(서기 1392년)에 포은 정몽주가 화(禍) 를 당하고 곧, 이태조(李太祖)가 등극하자 선생은 스스 로 눈먹고 귀먹은「맹오(盲 )」 라 하며‘맹세코 이씨 의 곡식을 먹지 않겠다.’ 고 한 후 두문불출하였다. 이 후 이태조가 다섯 차례나 벼슬에 오를 것을 청하였으 나 선생은 죽음을 각오한 채 왕명을 모두 거절하였 다.22) 이렇듯 곧은 박익 선생의 충절은 묘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고려 태조 왕건릉(王建陵)에 고려를 상징 하는 매화, 소나무, 대나무가 그려져 있는 것과 같이 박익 선생의 묘에도 소나무를 제외한 매화와 대나무 가 곳곳에 그려져 있다. 특히, 대나무가 나타난 벽화무 덤은 고려 태조 왕건릉과 박익 선생 묘가 유일하다.23) 박익 선생의 사망 연대는『송은선생문집』 에 의하면 무인년(戊寅年) 1398년 11월 27일이다. 그러나 묘지석 에 나타난 사망연대는 1420년(세종2년)으로 약 22년의 차이가 생긴다. 이는 문집의 사망연대가 잘못되었거나 혹은 이장(移葬)을 하였을 경우 이장하게된 연대를 묘 지석에 썼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24) 이에 KBS 역사스페셜 팀은 이장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 전문가 에게 의뢰, 시신의 위치와 상태를 확인한 결과, 이장할 때 생길 수 있는 흐트러짐이 전혀 없었다. 이러한 결 과는 묘지석의 사망연대가 맞을 수 있는 가능성이 높 아졌음을 의미한다. III. ( 壁畵) 1. 서북(西北)쪽 장벽(長壁)의 벽화 서북쪽 장벽의 벽화에서 눈으로 관찰할 수 있는 인 물은 여자 2인, 남자2인으로 모두 4인이다. 먼저 여자의 109 曺五順·劉珠利/密陽 古法里 古墳壁畵에 나타난 服飾 硏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