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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護石) 끝에서 바깥으로 200cm 정도 간격을 두고 자연 석으로 축조한 병풍석축이 있고, 그 사이 바닥에는 자 연 판석을 한 벌 깔아 놓았다. 내부 석실은 봉분 정상부에서 410cm 정도 깊이에 위치한다. 석실의 높이는 80cm, 폭은 90cm, 길이는 235cm로 고구려 벽화와 같은 웅장함은 없다고 할 수 있다. 석실의 양 단벽은 1매 판석을 사용하고, 양장벽 은 각각 상하 2단으로 포개진 4개의 판석을 연결하여 축조하였다. 그 위에 석회로 회칠하고 벽화를 그렸다. 벽화는 4면에 모두 배치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14) 북동쪽 단벽은 도굴과정에서 많이 훼손되어 확인하기 어려웠고, 나머지 3벽의 경우도 내부에 수분이 침투되 면서 일부 훼손되었고, 목관을 안치하는 과정에서도 훼손되는 등 원상을 유지하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비교적 잘 보여지는 동쪽 장벽의 그림에 여 인 3인과 남자 1인이 한 무리를 이루고 있고 앞쪽으로 일부 손상된 한 무리, 또 한 무리의 사람들이 4명씩 짝을 이루고 있다. 서쪽 벽도 마찬가지로 온전하게 남 아있는 여인 2인과 남자 2인, 앞쪽으로 일부 손상된 부분을 조합한 결과 세 무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따 라서 양장벽에는 4명씩 짝을 이뤄 세 무리가 있어 모 두 24명이 그려져 있었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15) 또한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있는 남쪽 단벽에는 말고삐를 잡고 있는 남자 2인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 훼손이 심 한 북쪽 벽과 천장에는 그림이 나타나 있지 않았다. 그러나 검은 먹선을 감지할 수 있는 적외선 촬영 결과 형태는 알 수 없으나 부분적으로 그림이 그려졌었다 는 증거를 찾을 수 있었다.16) 고구려 덕흥리 고분벽화 나 안악 3호분, 수산리 벽화무덤 등을 보면 북쪽벽에 는 묘주(墓主), 즉 피장자를 그려넣고 있으며 천장에는 천상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17) 박익 선생은 고려의 충 신이며 고려는 고구려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는 것 등에서 미루어 볼 때 밀양벽화에서도 북쪽에는 묘주 인 박익 선생을, 천장에는 별자리와 같은 천상의 세계 를 그렸을 것으로 생각된다.18) 그렇다면 벽화의 인물들은 제각기 손에 들고 있는 것으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특별한 의례를 위한 행렬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손에 들고 있는 그 릇류와 관모(冠帽), 당(幢) 등은 공양을 위한 도구로 생 각된다. 특히 일부 손상된 그림에는 찻잔을 든 손이 보이는데, 그 당시 차(茶)는 제일 귀한 공양이었다.19) 고구려 덕흥리 고분벽화의 경우 비슷한 구도를 보이 고 있다. 벽화 인물들이 모두 북쪽에 있는 묘주(墓主) 를 향해 있으며 공양을 하고 있다. 본 벽화에 나타난 인물들도 모두 북쪽을 향하고 있다. 따라서 이 벽화는 공양행렬도(供養行列圖)로 보인다. 함께 발굴된 화문석 에는 아미타정토(阿彌陀淨土) 사상(思想)을 상징하는 역만(卍)자와 장수(長壽)를 기원하는 국화, 윤회(輪回) 를 나타내는 연잎과 연꽃이 새겨져 있다. 이것으로 미 루어 볼 때 벽화에서 나타내고자 한 것은 아미타정토 108 A 제5권 제2호 <그림 5> 연꽃, 역만자 등이 그려진 魂留石 (박익 선생 묘) <그림 4> 안악 3호분 벽화에 그려진 墓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