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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다. 두발은 쌍수환계(雙垂環 )로 왼쪽과 뒤에 있는 여 인은 환(環)이 확실히 드러난다. 의례를 갖춰 화관류를 쓰거나 자신의 머리 혹은 가체를 이용하여 정수리에 서 환(環)을 만들어 장식하였다. 오른쪽 여인은 묘주 (墓主)의 것으로 생각되는 관모를 손에 들고 있다. 남자들은 서북쪽 벽화의 남자와 마찬가지로 단령에 목화를 신고 있다. 발목까지 닿는 단령에 직배래형의 착수(窄袖)이며 우임(右 )이다. 앞중심선이 있으며 옆 트임에 대(帶)를 매었다. 다른 것이 있다면 단령안에 받춰 입은 직령의 옷이 보인다는 점이다. 조선말에는 국속화되어 이중깃 형태가 되었던 중의(中衣)를 입고 있는 모습인 것이다. 들고 있는 T자형의 막대는 당(幢) 이라는 것으로 행렬시 붉은 천을 달아 세워두었던 것 이다. 왼쪽의 여인이 정성스레 받쳐들고 있는 것도 붉 은 천으로 싸서 공양하는 것이다. IV. 본 연구에서는 벽화에 나타난 복식을 문헌자료와 병행하여 조사, 분석하였다. 벽화에 그려진 인물은 모 두 26∼27명으로 추정되나 우리가 관찰 가능한 인물 은 여자 5인, 남자 4인이며 일부 훼손된 인물이 남자 2인, 여자 2인이었다. 여자들은 모두 둔부(臀部)를 덮을 수 있는 비교적 긴 길이의 유( )를 입고 밑에는 상(裳)을 입었다. 모두 우임이며 직령깃이나, 그 중 동정이 달렸거나 이중깃 의 형태인 것도 있었다. 상의 길이는 발목정도이며 허 리띠를 무릎아래까지 길게 늘였다. 머리는 양쪽으로 나누어 빗은 쌍수환계(雙垂環 )가 대부분이며 화관류를 착용하여 의례행렬임을 상징하 고 있다. 고구려 벽화와는 다르게 포(袍)를 착용한 여 자의 모습을 볼 수 없었으며 유( )에 대(帶)를 한 경 우와 안한 경우가 함께 공존하였다. 남자의 복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났다. 단령(團領) 에 테가 있는 마름모꼴 형태의 관모(冠帽)를 착용한 경우와 중거형의 포에 발립(拔笠)을 착용한 경우로, 후 자는 사자(使者)로 추정되는 두 명의 남자가 착용하였 다. 단령의 경우는 그 길이가 발목까지 길게 내려와 예를 갖춘 것으로 보이며 포(袍)는 무릎 아래 길이로 먼길을 안내하는 사자(使者)로서의 실용성을 갖춘 듯 하다. 송은 박익선생이 활발히 활동하였던 시기가 원(元) 간섭기였기에 몽고의 영향이 컸던 만큼 남자들의 관 모류에서도 그 영향이 나타났다. 여자들의 복식을 비 롯해 대부분은 약간의 변화가 있긴 하나 우리 고유의 복제(服制)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남녀가 모두 활동하기 편한 옷길이에 소매가 좁은 착수포와 같이 간소한 복장이나 관모류를 착용하고 예의를 갖춘 일 반인의 모습이었다. 1) 궁궐에서 쓰는 육류, 소금, 생선, 땔감 등을 조 달하는 조달청의 차관급 2) 한국미술연구소 편저, 고려시대의 불화-해설편, 시공사, 1996, p. 89. 3) Ibid., p. 89. 4) 김문자,” 高麗時代 여인들의 ·裳의 형태에 관한 硏究” , 복식학회지, 38호, 1998, p. 76 5) 유희경, “고려복식양식-여자복식을 중심으로-”, 학예지, 4호, 육사육군박물관, 1995, p. 118 6) 김문자, op. cit., p. 76 7) Ibid., p. 74 8) 임영미, “고려시대 인물관련 제작물을 통해서 본 복식에 관한 연구( 2)”, 복식학회지, 1994 9) 운견은 원래 고대 북방민족의 어깨 장식이었고, 그 원형을 어깨를 두른다는 의미의 피견(披肩) 에서 찾을 수 있다.(김민지, ‘발해복식연구 II’ , 1994, 복식학회지 22호, p. 105) 10) 임영미, 한국의 복식문화 I, 경춘사(서울), 1996, p. 449 11) 이경자, “木偶像의 服飾 考察”, 복식학회지, 2호, 114 A 제5권 제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