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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立志箴)>·<지신잠(持身箴)>등의 저술을 통해 선비의 학문 탐구와 바른 자세를 제시하였다 한다. 여러 왕조를 거 치면서 남으로 왜구와 북의 호적을 평정하여 공적을 세웠지만, 그러나 고려의 국운이 쇠퇴하여 포은이 피살 당하 는 날에 선생은‘나 역시 고려 왕씨의 신하이니 조선 이씨의 곡식을 먹지 않겠다’하며 벼슬을 버리고 밀양으로 내 려와 삽포의 시냇가에 솔을 심고 내의 이름을 송계(松溪)라 부르며 스스로 송은(松隱)이라 호했다 한다. 1395년에 태조가 한양으로 왕도를 옮긴 뒤 선생에게 공판·형판·예판·이판 등의 벼슬을 내려 불렀으나 불응했고, 후에 다시 좌상(左相)으로 불렀으나 이마저 거절했다. 이에 송은 선생을 세칭 두문동 72현이라 부르고, 고려 팔은(8隱 : 포은 정몽주·목은 이색·야은 길재·도은 이숭인 혹은 성은 김대윤·송은 박천익·동은 이재홍·만은 홍재· 휴은 이석주)의 한 분으로 칭한다. 이 모선정에는 경상남도 지정 유형문화재 351호인 박익 선생의 유고 시문집을 6 253 경남은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