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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덕남서원 옆모습 4. 종가 안채가 세월에 삭아 낡고 있다. 5. 박수견은 시묘 3년을 마치고도 묘소에서 곡읍으로 몸을 바쳤다. 6. 덕남사로 들어오는 솟을대문 3 4 252 경남은행 5 先亭)이라 한데서 비롯된 이름이다. 1500년(연산6) 초에 모선정이 창건되고 주위의 산천을 비롯한 동 이름을 모선으로 칭하여 박수견의 효행을 기려 왔지만, 왜란으로 소실되어 버린 것 을 150년이 지난 영조년간(1742-1776)에 이르러 9세손 덕계(德溪) 박증엽이 지금과 같이 단층 팔작지붕의 목조와가 정면 6칸, 측면 2칸으로 중건했다. 1833년(순조 33)에는 모선정 경내에 고려말 두문동 72현 중의 한 사람이자 8은 중의 한 사람인 충숙공 송은 박익(朴翊)과 그의 아들 우당 박융(朴融), 인 당 박소(朴昭) 형제 등 3부자를 봉안하기 위해 사림의 중론을 모아 덕남사(德 南祠)를 창건한 후, '덕남서원'이라 승호(陞號)하여 향사를 받들었다. 그러나 1868년(고종 5)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위의 건물들이 강제로 헐리 게 되자, 송은 선생의 영정을 별묘에 이안(移安)하였다가 1933년에 초동면 신호리 모선정 후편에 영정각을 신축하여 영정을 옮겨 봉안하고, 아울러 사 림의 공의(公議)로써 사향(社享)을 받들고 있던 중 1989년 덕남사로 현액(懸 額)하였다. 간단하게 송은을 설명하면, 초명은 박천익(朴天翊) 으로 밀양시 부북면 삽포(현 사포리)에서 태어났다. 공민왕조에 관직에 나아가 예부시랑 을 거쳐 세자이부(世子貳傅)에 임명되어 중서령을 겸했으며, 29세에<입지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