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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 우리는 인도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석재인 샌드 스톤의 산지를 찾아 몇 가지의 샘플 을 채취, 파사 석탑과 비교하는 성분 검사를 해 보기로 했다. 다소 무모한 듯한 이 돌의 성분 비 교 검사 결과는 프로그램이 방송될 무렵에나 나 올 것이다. DNA 검사 결과를 기다리며 과연 20여 명이나 되는 허 왕후 일행이 인도에 서 왔을까. 그렇다면 1995년 김해 예안리 지방 에서 대량으로 발굴된 유골 중 혹시 인도 쪽의 혈통이 있지는 않을까. 1700년 전의 비밀을 간 직하고 있는 유골에 대한 유전자 감식 검사가 진 행중이다. 부산대학교 박물관 측의 협조로, 서울 대 의과대학 생화학과 서정선 박사 팀이 유전자 채취를 실시, 현재 검사가 진행 중이다. 유전자 검사 결과 인도 쪽의 혈통이 검출된다 면 이는 가야의 건국 신화가 실제였음을 입증하 는 설득력 있는 증거가 될 것이다. 유전자 검사 부문의 권위자 서정선 교수는 현재 남아 있는 우 리 민족 유골 중에 가장 오랜 것 중 하나인 예안 리 가야 유골에 대한 유전자 검사를 실시, 북방계 로만 알려졌던 우리 민족의 뿌리가 과연 어디에 서 왔는지 밝혀내는 데 상당히 기대를 하고 있다. 철의 강국 가야의 해상 무역 과연 허 왕후 일행은 왜 인도에서 왔을까. 가야 의 발달된 철기 문화는 한중일을 포함한 동북아 지역에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고, 가야는 첨단 산업인 제철 산업의 강국으로서 농기구, 갑옷 등 을 생산, 해상 무역을 주름잡고 있었다. 1세기경 김해는 국제무역항이었다. <삼국유사>는 신라 의 석탈해가 김해의 금관가야를 침입해 김수로 왕과 다퉜는데 김해는 당시 무려 500척의 배를 일시에 동원해 적을 쫓을 만큼 대단한 해상 왕국 이었다고 뒷받침하고 있다. 한반도에서 인도까지 해상 네트워크를 밝힌다 김해 지역에 내려오는 전설에서 출발한 이 프로 그램은 <삼국유사>의 기록, 인도 현지 등을 취 재, 인도 공주 허황옥이 가야로 시집온 것이 역 사 사실일 수도 있음을 밝히는 데 주력한다. 또한 고대 가야 왕국의 국제 교류가 중국을 넘어 인도까지 연결될 만큼 왕성했음을 확인시 켜준다. 수로왕과 인도 공주 허황옥의 국제결혼 은 발달된 철기 문화를 매개로 2000년 전에 한 반도에서 인도까지 대 해상 네트워크가 이미 존 재했음을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25 l May 2004 에게 한 번 찾아봐 달라고 했다. 그에게 좋은 자 료들이 있기 때문이다. 대만에서 발간된 <중문 대사전>에 아유타가 있다는 연락이 왔다. 급기 야 현장 스님의 <대당서역기>에서 아유타를 발 견할 수 있었다. <삼국유사>의 기록과 한 자도 틀리지 않는 아유타가 있었다. 일연 스님이 언급 한 아유타는 바로 그 나라가 틀림없는 것이다. <대당서역기>는 현장 법사가 당나라를 떠나 17 년간 인도를 기행하며 적은 방대한 기행문이다. 스님은 그 안에 아유타를 자세히 언급해 놓았다. 아유타는 의심할 것 없는 인도의 한 지역이었다. 그런데 현장 법사는 허 왕후보다 600년 뒤에 존 재한 인물이다. 시대적 차이를 어떻게 극복했을 까. 당나라 600년 이전인 AD 1세기에도 아유타 가 존재했었단 말인가. 인도로 가야 했다. 인도 이름으로‘아요디아’ 인 아유타의 유적 은 남아 있는지, 당시 인도에는 어떤 역사가 있 었는지, 허 왕후 일행은 어떻게 한반도까지 오게 되었는지 취재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요디아를 찾아 아요디아를 찾기 전에 델리대학을 찾았다. 인도 에서 수재들만 다니는 국립대학이다. 델리대학 역사학과 교수 두 분을 만나서 인터뷰를 청했다. 묻고 싶은 모든 것을 취재했다. 그러나 허 왕후 와 관련된 직접적인 역사는 들을 수가 없었다. 다만 당시 인도의 정황상 허 왕후 일행이 한반도 로 이동했을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허 왕 후가 존재하기 2, 3세기 전에 이미 인도는 주변 지역을 정복하고 동남아 일대로 해상을 통해 무 역을 활발히 했다. 당시 무역풍의 발견으로 이전 에 육로인 실크로드를 통한 무역보다 해상을 통 한 교역이 더 활발해지는 단계였다. 물론 인도의 무역에는 종교인 불교 전파가 항상 함께했다. 아요디아는 종교 도시 자체였다. 불교·자이 나·힌두·라마·이슬람까지 온갖 종교의 사원 이 6000여 개소가 되었다. ‘정복할 수 없는 땅’ 이라는 뜻의 아요디아. 그곳에 대대로 내려오는 왕손가문 성문 위에 남겨진 쌍어문양이 가야와 아요디아를 연결하는 표징처럼 보였다. 샌드 스톤의 산지 주나르에서 수로 왕비 허 왕후가 인도에서 왔다는 유일한 유 물적 증거물은 파사 석탑이다. <삼국유사>엔 허 왕후가 인도에서 이 신비의 돌탑을 가져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동안 뱃사람들이 고기잡이를 떠날 때 이 돌을 싣고 다녔다고 한다. 이 신비의 인도 돌이 해상의 안녕을 지켜준다는 믿음 때문 이었다. 과연 이 돌탑이 인도 돌로 만들어졌을 KBS Journal l 24 현장 법사의 <대당서역 기>에 근거, 인도의 한 지역으로 추측되는 아 유타. 인도를 찾은 제 작진은 허 왕후의 자취 를 좇았다. 아유타의 흔적과 기록을 찾을 수 있었고, 그것은 허황옥 이 인도의 공주였을 가 능성을 더욱 확실히 해 주었다. 1995년 김해 예안리 지방에서 대량으로 유 골 발견. 1700년 전의 것으로 판단되는 이 유 골들 중에 혹시 인도쪽 의 혈통은 없을까. 제 작진은 이 유골들에 대 한 유전자 감식을 진행 중이며, 검사 결과 인 도쪽의 혈통이 검출된 다면 우리 민족의 뿌리 가 어디서 왔는지 더욱 확실히 알 수 있는 사 건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