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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2025년 7월 테마가 있는 독립운동사 ②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같은 소리로 서로 응하여 이곳 북미 합중국 워싱 턴주 시애틀 항에 있는 한인이 동맹신흥회를 창립하 고, 나라 일에 몸을 받치기로 하여 이에 취지서를 내 외의 충애열렬(忠愛熱烈)한 동포에게 포고하노라.” 시애틀의 한인들이 국망의 위기에 놓인 조국의 국 권을 회복하기 위해 ‘동맹신흥회’를 조직한 것이다. 동맹신흥회는 1908년 2월 시애틀 4번가 1425호에 ‘동맹신흥회관’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이 회관에서 는 한인들의 숙박과 노동을 주선하는 역할을 수행하 였다. 북미에서는 1905년 4월 안창호 주도하에 공립 협회가 창립되었고, 11월에 ‘을사늑약’이 체결되 자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1905년 12월 패사디나 (Pasadena)에서 대동교육회를 결성하였다. 대동교 육회는 교육을 통한 실력양성을 하는 목적으로 설 립한 단체였으나, 일제에 의해 국권이 침탈당하자 1907년 3월 회명을 ‘대동보국회’로 고치고 본격적인 정치운동 단체임을 표방하였다. 샌프란시스코에 대 동보국회 중앙회를 설치하고 공립협회와 쌍벽을 이 루면서 미주지역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샌프란시 스코의 대동보국회에서는 시애틀의 동맹신흥회와 1909년 8월 경에 합동을 하였다. 시애틀의 한인 노동주선소 시애틀에는 샌프란시스코와 같이 많은 한인들이 살지는 않지만, 항상 수십명의 한인들이 내왕하는 대도시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한인들에게 노동 을 주선하고, 숙식을 제공하는 기관이 반드시 필요 했다. 시애틀에 오는 한인들은 알래스카에서 고기를 잡거나 혹은 통조림 공장에서 일을 하는 노동자들이 었다. 알래스카 어업은 힘이 많이 들고 위험하기 때 문에 임금도 많이 주었다. 그렇지만 고기 잡는 일은 너무 힘들어서, 쉽게 이 일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친일외교관 스티븐스를 처단하려고 한 전명운 의 사도 한 때, 알래스카에서 어업에 종사하였다. 이상 설이 쓴 『양의사 합전』을 보면, 알래스카에서 일본인 감독 밑에서 어업을 하였다고 한다. 전명운은 알래 스카에서 일본인 감독의 부당한 처사에 대해 단연코 반발했으며, 동포들의 임금을 지불하지 않는 일본인 보스에게 임금을 대신 받아주었다. 그리고 전명운은 알래스카 어업노동주선소를 운영하기도 했다. 알래 스카에서 한 달 일을 하면 155달러에서 180달러로, 북미 샌프란시스코에서 노동하는 것보다 임금이 배 가 넘었다. 아무튼, 시애틀에는 이런저런 일자리가 있었기 때 문에 이곳에 한인 노동자들이 몰려들었다. 그래서 1911년 10월 시애틀에 한인여관과 노동주선소가 설 립되었다. 한인여관은 원춘식이 주무를 맡았고, 노 동주선소는 백화경이 운영하였다. 한인여관과 노동 주선소에서는 숙식을 제공하고, 또 일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1911년 11월 1일 이대우는 시애틀 다운타운에 상점을 열고, 그 옆에 ‘동양노동소’라는 노동주선소를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동양노동주선 소의 주무원 이대우는 『신한민보』 1911년 12월 11 일자에 다음과 같은 광고를 냈다. “본인이 동포의 진취함을 도읍기 위하여 본소를 설립하옵고 현금 제반 노동을 주선하오며 풀상과 담 배전을 배치하였사오니, 이 근방에 왕래하시는 첨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