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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2025년 7월 테마가 있는 독립운동사 ②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집조(執照), 즉 오늘날 ‘여권’을 발급 받았다. 도산의 ‘집조’ 앞면에도 캐나다 밴쿠버(Vancouver)라고 찍 힌 인장 옆에 1902년 10월 7일자 미국 이민국장(US Immigration Service Commissioner) 인장과, 10 월 14일자 샌프란시스코항 미국 이민국 인장 두 개 가 찍혀있다. 이 두 개의 인장을 통해, 10월 7일 미국 시애틀을 거쳐, 14일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 는 것을 알 수 있다. 도산 부부는 1902년 당시 밴쿠 버에서 시애틀까지 정기적으로 증기선이 운항되고 있었기 때문에, 밴쿠버에서 증기선으로 시애틀 항구 로 들어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국민보』 1958년 4월 23일자의 「대한인국민회 역 사 간략」이라는 기사에 보면, “안창호, 1902년 10월 에 안창호 씨가 동부인하고 시애틀 시쾡모바항을 경 유하여 도미하셨다”는 내용이 있다. 이 기사에는 안 창호가 도미한 날짜부터 착오가 있기는 하지만, 안 창호 부부가 1902년 10월 시애틀의 시쾡모바항을 경유하여 샌프란시스코로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애틀 최초의 한인단체 동맹신흥회 워싱턴주 ‘시애틀’에 제일 먼저 들어온 한국인은 아마도 ‘고려인삼’을 팔고 다녔던 사람들일 것으로 추정된다. 19세기 말부터 고려인삼을 파는 인삼상들 이, 중국인들을 따라 북미지역으로 왔다. 그러나, 이 들이 어떠한 활동을 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인삼장 수 외에 처음으로 시애틀에 온 유학생이 안창호 부 부였다. 국내에서 유학이나 이민을 온 사람들이나, 하와이 에서 북미로 오는 사람들이나 모두 샌프란시스코 아 니면 시애틀 항구 중 하나를 거쳐야만 했다. 시애틀 항구로 오는 한인들의 대부분은 하와이 이민자들이 었다. 1903년 하와이로 이민을 온 사람들은 사탕수 수농장에서 일을 하였다. 그러다가 1~2년이 지나면, 북미로 왔다. 하와이에 비하여 북미에는 경제적으로 더 많은 이익이 있었고, 또 노동을 하면서 공부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공립신보』 1906년 3월 12일 자에는 “만주리아 선편에 한인 12인이 하와이로부 안창호가 미국 유학올 때 사용한 집조(여권, 독립기념관 제공) 안창호·이혜련 부부가 입항한 시애틀 항구의 현재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