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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2025년 6월 테마가 있는 독립운동사 ②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대학과 노스웨스턴대학 등에 많이 다녔고, 오하이 오주립대학(University of Ohio)과 오하이오 웨슬 리안대학(Ohio Wesleyan University), 오벌린대학 (Oberlin College) 등에 한인 학생들이 있었다. 1910년대 대부분의 미국 유학생들은 오하이오 웨 슬리안대학에 입학하였다. 이 학교를 거치거나 졸업 하고 미국 동부의 유명 사립 대학교에 입학하였다. 오하이오 웨슬리안대학은 주도 콜럼버스에서 북쪽 으로 48km 떨어져 있는 델러웨어(Delaware)라는 작은 도시에 자리잡고 있는 감리교 계통의 학교이 다. 이 대학은 1842년에 설립되어 많은 외국 학생들 을 받아들여 교육시키는 학교였다. 웨슬리안대학은 한인 학생들이 유학했는데, 특히 미주의 감리교와 연관되어 유학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인연에는 웨 슬리안대학 총장 웰치(Herbert Welch)의 역할이 컸 다. 웨슬리안대학의 총장인 웰치는 1862년 뉴욕에 서 태어나 1909년 감리교 목사가 되었다. 1905년부 터 1916년까지 웨슬리안대학교 총장 을 역임하였고, 그후 바로 한국과 일본 의 감리교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최초의 외국유학 여성 문학사인 하 란사도 하워드대학을 다니다가 웨슬 리안대학을 다녔고, 그녀가 수학할 당 시 웰치가 총장이었다. 하란사는 이를 바탕으로 유대관계를 맺어 그에게 한 국감리교 감독을 요청하여 한국감리 교 감독으로써 활동하는데 기여하였 다. 김도연과 김활란의 경우도 웰치 총 장에게서 입학추천서를 받아 유학할 수 있었다. 1919년 2·8독립선언의 당 시 「결의안」을 낭독한 김도연도 웨슬리언대학을 다 녔다. 그의 『나의 인생고백』에는 “우리나라 유학생 이 모두 네 사람이었다. 유형기·김기후 두 형과 김활 란 양, 그리고 나까지 네 사람이었다”한다. 웨슬리언 대학을 졸업한 유학생들은 대부분 뉴욕의 콜롬비아 대학이나 인근의 오하이오주립대학 등으로 진학하 는 경향을 보였다. 이밖에도 웨슬리안대학에는 의친 왕 이강을 비롯하여, 박에스터, 신흥우 등도 이 대학 에서 수학하였다. 오하이오주 한인들의 3·1운동 오하이주 애크론(Akron)의 한인들도 1919년 3월 13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로부터 국내에서 독립 을 선언하였다는 전보를 받아보게 되었다. 오하이 오주 한인들은 모두 기쁨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애크 론지방회 회장 노진국은, “당지 회원들은 중앙총회 장의 전보로 인하여 대한독립의 선고됨을 알고 크 웨슬리안대학에 재학했던 김도연이 1919년 2·8독립선언 이후 감옥에서 석방 된 이후 촬영한 사진(뒷줄 가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