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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가 있는 독립운동사 ➋ • 미국 서북부 태평양 연안 ‘시애틀’에서의 한국독립운동 93 북미 시애틀 항구로 입국하는 한인들 아시아 지역에서 미국으로 오는 대부분의 선박 들은 샌프란시스코 항구로 들어온다. 그리고 그 외 에는 시애틀 항구를 통해 미국에 입국한다. 한국인 들은 일본 요코하마(橫濱)나 코베(神戶)에서 배를 타 고 하와이를 경유하여 북미로 온다. 아니면 중국 상 하이에서 배를 타고, 마닐라와 하와이를 들러서, 북 미로 온다. 이와 같이 태평양 연안에는 샌프란시스 코와 시애틀 두 개의 항구가 있었다. 시애틀 항구는 1891년 1월부터 개설되어 1895년 2월에 증기선 윌 라파(Willlapa)가 운행되었으며, 1897년경부터 알 래스카와 캐나다를 왕복하는 증기선이 운행되었다. 코베에서 북미까지 선비(船費)는 일본배 65엔, 미국 배 63엔 정도였다. 미국의 항구에 도착하면 눈검사 와 소지품 소독비로 3달러를 내야만 했다. 서울에서 미국에 오려면 소지금 100엔과 여비 등을 합쳐서 총 190엔 정도가 소용되었다. 1900년대 초반 북미로 온 한국인들은 샌프란시스 코나 시애틀 항구를 통해 입국을 하였다. 미국에 온 한인들은 영어가 들리는대로 ‘씨앗틀, 씨아를, 씨아 틀’이라고 불렀다. 북미 태평양 연안에서 가장 큰 도 시는 샌프란시스코이고, 또 샌프란시스코에 가야만 일자리를 구하기 쉬웠다. 그런데, 왜 시애틀 항구를 통해 미국에 입국하는 것인가. 그 이유는 시애틀 이 민국을 통해서 입국하는 것이, 샌프란시스코 보다는 훨씬 입국심사가 까다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인들 은 일본 코베에서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배와 시애틀 로 가는 배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한다. 그런데, 한인들은 미국에서 이민 심사검사가 엄격하지 않는 시애틀로 가는 배를 선호하였다. 미국 유학을 온 안창호 부부, 시애틀로 입국 미국에 유학을 오는 한인 학생들은 대부분 고학으 로 배움을 이어갔다. 한인들은 미국의 가정에서 숙 식을 하고 약간의 용돈을 받아가며 학교를 다녔다. 이를 ‘스쿨보이(School Boy)’라고 불렀다. 미국인 가 정에서 아침과 저녁 일을 해주고, 그 집에서 숙식을 해결하였다. 스쿨보이는 아침 6시부터 8시 30분까 지 청소도 하고, 주방 일을 돕는다. 아침을 먹고 점심 도시락을 싸가지고 9시까지 학교에 간다. 학교에서 점심을 먹고 오후 3시까지 공부를 하고 집으로 온다. 오후 4시 30분부터 7시 30분까지 3시간 가량 미국 가정의 화초에 물도 주고, 청소와 주방 일을 한다. 그 리고 방으로 돌아와 학교에서 배운 것을 공부한다. 미국 집의 일을 도운 댓가로 일주일에 2달러 50센트 에서 3달러 50센트까지 돈을 받아, 학비와 용돈으로 사용하였다.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1878~1938)도 고학을 각오하고 미국 유학을 왔다. 도산은 24살, 부인 이혜 련은 18살이 되는 1902년 9월 3일 밀러(Miller) 목 사의 주례로 서울 제중원에서 혼례를 올렸다. 안창 호는 미국 유학을 위해 대한제국 외부(外部)로부터 1891년 11월 경의 시애틀 항구(이하 사진은 필자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