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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 칼럼 ➊ • 총칼 대신 문학·음악·신앙·체육·언론 등으로 일제에 맞서싸웠던 애국자들 9 문학 · 음악 · 신앙 · 체육 · 언론 분야에서도 항일독립 투쟁 전개 나라를 되찾기 위해 자신의 희생이 따를 행위인 총과 칼을 들고, 폭탄을 들고 투쟁한 선열들에 못지 않게 자신의 전공 분야에서 투쟁한 애국지사들을 잊 을 수 없다. 몇몇 사례를 상기하기로 하자. 다음에서 거명하는 순서는 중요성의 순서가 아님을 분명히 해 둔다. 첫째, 1942년 10월에 조선총독부가 조작한 「조선 어학회사건」이다. 일제강점기 말기인 이 시점에 일 제는 조선어를 말살하려는 총독부의 시책에 맞서 조 선어를 연구하고 조선어사전을 편찬하는 한글학자 들을 체포하고 결국 이희승(李熙昇)과 최현배(崔鉉 培) 선생 등 16명을 기소했다. 안타깝게도 이윤재(李 允宰)와 한징(韓澄) 두 분은 옥사했다. 우리말과 글을 지키려는 이 분들의 수난 위에서 해방 이후 한글은 살아남을 수 있었고, 오늘날에는 세계의 많은 나라 들에서 배우려고 하는 언어가 되었다. 유럽의 어떤 선진국들의 대학은 한국어를 제2외국어 또는 제3외 국어로 지정하기에 이르렀다. 둘째, 신앙으로써 저항한 개신교도들이다. 그 들 가운데 우선 떠오르는 분이 평양 산정현교회의 주기 철(朱基徹) 목사였다. 1897년에 태어난 그는 일제가 1938년 2월 이후 강요하는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 해 투옥되었다가 1939년 4월 21일에 48세의 나이 로 평양형무소에서 순교했다. 셋째, 무교회주의자인 개신교도 김교신(金敎臣)이 었다. 주기철 목사보다 네 살 아래로 1901년에 태어 난 그는 당시 일본에서 수재 가운데 수재만 입학할 수 있다는 도쿄고등사범학교를 졸업했기에 속된 말 로 출셋길이 열려 있었다. 그러나 일본에서 무교회 주의운동을 창도한 우치무라 간조[内 村鑑三]의 영향 을 받아 귀국한 뒤 『성서조선(聖書朝鮮)』을 자비로 출판하며 ‘조선적(朝鮮的) 기독교’ 정립에 힘 쏟았다. 그것은 일종의 항일운동이었고, 그래서 일제당국은 그를 늘 감시하다가 마침내 꼬투리를 잡았다. 1942 년 3월 제158호의 권두언으로 “개구리의 죽음을 슬 퍼한다”라는 뜻의 「조와(弔蛙)」를 발표했는데, 일제 당국은 이것이 “어떠한 거센 추위에도 살아남는 민 족혼을 고취시킨 것”이라고 우겨대며 『성서조선』을 2024년 10월 8일 오전 세종특별자치시에서 ‘제1회 세종한글대전(세종한 글올림피아드)’을 마친 참가자들이 정자관을 날리며 기념 세레모니를 하고  있다. 온라인 예선을 통과한 유학생 24개국 105명을 대상으로 열린 세종 한글대전은 세종특별자치시와 코리아헤럴드 헤럴드경제, 세종시문화관광 재단 공동주최로 개최했고, 국립한글박물관이 후원했다(헤럴드경제 제공). 해방 후 다시 모인 조선어학회 구성원들. 1945년 11월 13일에 촬영된  위  사진에서 앞줄 왼쪽 두번째가 이병기, 네번째부터 이극로, 이희승, 정인승,  한 명 건너 정태진, 가장 오른쪽이 김윤경이다(오마이뉴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