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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의공 정기룡 장군 임란 전승기념탑 (忠毅公鄭起龍將軍壬亂戰勝記念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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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의공 정기룡 장군의 자는 경운(景雲)이며 호는 매헌(梅軒)이다. 초명(初名)은 정무수(鄭茂壽)이나 무과 급제(及第)시 선조(宣祖)임금 으로부터 기룡(起龍)이란 이름을 제명(題名) 받았다. 장군은 1562년 음력 4월24일(양력 5월26일) 경남 하동군 금남면 중평 리에서 유생(儒生) 정호(鄭浩)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장군의 나이 31세 되던 1592년 4월 임진왜란 때 별장(别将)이 되어 거창전투에서 큰 활약을 하였고 김산(金山) 전투에서 포로가 된 경상 우방어사 조경(趙儆) 장군을 필마단기(匹馬單騎)로 구출하였다. 장군은 임란 당시 상주(尙州)지역을 중심으로 누란(累卵)의 위기에 놓인 조선(朝鮮)을 구한 육전(陸戰)의 명장이셨다. 무장(武將)으로서 장군의 기백과 능력은 당파를 초월하여 높이 칭송 받았다. 영의정 겸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전쟁을 총괄 지휘한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은 수차례에 걸쳐 선조(宣祖) 왕에게 장군의 공훈을 직접 아린 바 있으며, 사후(死後)에는 노론의 영수(領袖)였던 우암 송시열(宋時烈) 역시 장군의 공훈을 극찬하며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지었다. 장군은 관군(官軍)의 장수로서 왜적과 싸우며 나라를 지켰을 뿐만 아니라 혼란한 전란을 틈타 도둑질로 민심을 흉흉하게 하는 도적(盜賊)들을 소탕하여 백성을 보호하였다. 또한 왜적에 투항한 후 이에 빌붙어 나라를 파는 매국(賣國)의 무리를 응징하며 군왕(君王)에 대한 충성과 사회의 정의를 지켜냈다. 장군은 임란초기 왜군의 횡포로 용화동(龍華洞)에 피신한 상주백성을 안전하게 구출 했을 뿐 아니라, 일본군에게 빼앗긴 상주(尙州城)을 상주백성들과 함께 뛰어난 지략과 용맹성으로 야간 화공(火攻)매복 작전으로 탈환하였다. 장군은 상주 판관(判官)과 상주목사(牧使)등 6년 동안 상주에 봉직(奉職) 하시면서 왜적으로부터 상주(尙州)백성을 안전하게 지켜주시고 구휼(救恤)하여 주신 우리의 은인(人)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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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난 리더십과 애국(愛國) 애민(愛民) 정신을 몸소 실천한 구국의 명장이요 청렴한 목민관 이셨다. 바다에 이순신장군이 있었다면 육지에는 정기룡장군이 있었다는 역사의 전언(傳言)이나 선조 임금께서도 "정기룡이 없었다면 영남은 없었고(起龍無則嶺南無)영남이 없었다면 우리나라도 없었다(嶺南無則我國無)라고 했듯이 60전 60승의 위대한 업적을 이루신 임란 육전의 영웅이시다. 장군은 1621년(광해13)에 품계는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이고, 관직은 삼도통제사(三道統制使) 겸 경상우도수군절도사(慶尚右道水軍節度使)를 맡다가 1622년(광해 14) 2월 28일 통영(統營) 진중(陣中) 에서 61세로 순직하셨다. 묘소는 장군의 유언에 따라 상주시 사벌국면 금흔리 모친 산소 아래에 안장 되셨고 충의사(忠毅祠)에 제향(祭享)되어 있다. 1773년(영조49)에 시호(諡號) 충의(忠毅)를 하사 받았다. 장군이 떠나신지 400년 만에 상주 시민의 뜻을 모아 장군의 위업을 기리는 전승탑을 세우다 충의공 정기룡장군 기념사업회 회장, 예비역 육군소장 김홍배(金洪培) 쓰고, 상주시에서 세우다.